[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26. 흥행사 맥켄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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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밥 맥 맥켄스를 만날 무렵의 필자.

당시에는 일본 오키나와에도 미군이 주둔하고 있던 터라 간혹 그곳 클럽에서 공연하기도 했는데, 거기에서 밥 맥 맥켄스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나에게 라스베이거스 쇼 진출을 제의했고, 나는 그의 말을 듣자마자 무조건 에드 마스터즈와 협의해 달라고 했다. 내가 일본에서 활동하는 내내 에드 마스터즈는 후견인이 되어 MK프로덕션과 함께 모든 것을 협의, 결정해주었다. 나 역시 모든 것을 에드 마스터즈와 상의할 정도로 그에게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후견인 자격으로 밥 맥 맥켄스를 만난 에드 마스터즈는 김 시스터즈를 미국에 진출시켜 큰 성공을 거두게 한 흥행사가 그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밥 맥 맥켄스는 우리나라 미8군 쇼 무대에서 활동하던 김 시스터즈를 1958년 한국 가수 최초로 미국 라스베이거스 쇼에 진출시킨 사람이었다.

고인이 된 가수 이난영 선배와 작곡가 김해송 선생의 세 딸인 김영자·숙자·애자씨로 구성된 그룹이 김 시스터즈이다. 미국 진출 후에는 영자씨 대신 이난영 선배의 조카 이민자 씨가 투입되었다고 한다. 김 시스터즈는 중국인형처럼 귀엽고 앳된 외모에 노래와 춤은 물론 드럼·트럼펫·아코디언 등 다양한 악기를 번갈아 연주해 미국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미국 진출과 동시에 이민 1세대 가수로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김 시스터즈의 뒤를 이을 가수를 물색하던 밥 맥 맥켄스는 오키나와 미군 부대 클럽에서 공연하는 나를 보게 된 것이라고 했다. “패티! 밥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니 그의 말대로 라스베이거스로 가보는 것이 좋겠어요! 역시 미국은 쇼 비즈니스의 본고장이라고 할 수 있지 않나요?”

‘미국’이라는 단어에 나는 귀가 번쩍 트이는 것 같았다. ‘그래! 팝을 제대로 하려면 역시 미국에 가야지!’

패티 김이라는 한국 가수를 일본 사회에 뿌리내리도록 하기 위해 장기적인 투자를 아끼지 않았던 MK프로덕션으로서는 아쉬움이 컸겠지만 그들 역시 내 미국행을 막지는 않았다. 일본에서 활동하는 한국 가수의 한계와 제약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극복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르는 바 아니었기에 막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62년 결국 나는 라스베이거스로의 진출을 결정했다. 60년 12월 처음 일본에 왔으니 만 2년도 채 안 돼 나는 또 다른 기회를 손에 넣었고 다시 한번 새로운 도전을 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전직 가부키 배우였던 MK프로덕션 고바야시 사장은 가업인 인쇄회사를 물려받아 기업가로 변신한 뒤 번 돈을 지속적으로 엔터테인먼트 사업에 투자함으로써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다른 방법으로 실현하는 굳은 심지를 가진 사람이었다.

물론 에드 마스터즈가 많은 힘을 써주었겠지만 고바야시 사장 역시 더 큰 꿈을 향해 나아가려는 후배 엔터테이너의 꿈을 적극 지지해주었다. 고바야시 사장과의 인연은 그 뒤로도 계속돼 10년이 훌쩍 지난 74년 도쿄국제가요제 출전을 위해 일본에 갔을 때도 여러모로 도움을 주었다.

패티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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