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랑방>TV토론 함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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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선거에 나선 후보들의 TV토론이 유권자들의 투표결과에 미치는영향을 가장 최초로,가장 강력하게 보여준 것은 1960년의 미국 대통령선거였다.당시 현직 부통령이었던 닉슨과 상원의원이었던케네디와의 네차례에 걸쳐 진행된 TV토론은 아 직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던 6%의 유권자들(약 4백만명)로 하여금 표의 행방을 가름케 했고,그중 3백만표를 얻은 케네디는 1백만표의 획득에 머무른 닉슨을 전체 득표수에서 불과 11만여표 앞서 당선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두 후보에게 TV토론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던들,아니면최소한 「통신에 관한 법률」중 공직에 출마한 모든 후보에게 무료로 균등한 시간을 할애하도록 규정한 「315항」이 존속해 두후보외에 다른 14명의 후보들에게도 똑같은 T V토론의 기회가주어졌던들 선거결과는 달라질 수도 있지 않았겠느냐는 견해는 그래서 타당한 일면이 있다.결과만 놓고 본다면 그것은 TV토론을통해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케네디의 「연기력(演技力)의 승리」였다.
그렇다면 TV토론에 임하는 정치인들의 연기는 연극.영화.TV드라마에 출연하는 연기자들의 연기와 무엇이 어떻게 다를까.말.
표정.몸짓으로 관객을 자기세계로 끌어들여야 한다는 점에서 정치인들의 연기와 연기자들의 연기는 다를바 없다.
그러나 극중의 연기자들은 미리 만들어진 대본에 의해서만 움직여야 하는 반면 정치인들은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자유롭게 말하고 표정짓고 행동할 수 있다는 점이 다르다.
연기자에 대한 평가기준이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귀에 들리는것인데 반해 후보들에 대한 평가기준은 보이고 들리는 것 이상의어떤 것이라는 점도 중요한 차이점이다.
물론 연기자는 연기 자체가 직업이므로 말이나 표정이나 몸짓등모든 면에서 완벽한 연기를 추구하게 마련이지만 후보의 TV토론은 단지 당선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일 따름이므로 꼭 전문가적인 연기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그러나 유권자나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는 점에서는 정치인들 쪽이 연기자들 쪽보다 훨씬절실하고 어렵다.연기자들과는 달리 정치인들은 「내면의 진실」을보여줘야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아직 텔레크라시,곧 TV정치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 유권자들이 그 「내면의 진실」을 받아들이는 방법에서 보편적 가치관의 척도를 세워놓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가령 서울시장 선거에 나설 세후보의 첫 TV토론을 시청한 유권자들의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다.말솜씨를 평가의 척도로 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표정과 자세로 순위를 매기는 사람도 있었고,또 어떤 사람은 용모나 제스처를 기준으로 삼아 당선가능성을 점치기도 했다.이같은 현상은 그이후 계속 진행된 다른 지역 후보의 TV토론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이 바로 TV토론의 함정이다.TV라는 매체는 후보들의 「연기」에 따라 진실을 호도할 수도,거짓을 진실로 뒤바꿀 수도 있기 때문이다.후보들의 자질이나 역량,그리고 무엇보다 「내면의진실」과는 무관한 그같은 평가기준이 표의 행방으 로 이어질 가능성도 크다는데 TV토론의 역기능이 감춰져 있는 것이다.
선거관리위원회가 각 방송사에 TV토론을 무제한 허용함에 따라이번 4대 지방선거는 후보들의 「연기능력」이 선거결과에 엄청난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주도하는 방송사측이 운영의 묘를 살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유권자들이 냉철한 이성으로 화면에 비치는 후보들의 겉모습과 말솜씨만으로 지지여부를 결정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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