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창 회견 배경은] 盧 책임론 제기…野에 힘 싣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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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나라당 당사 기자실로 들어서는 이회창 전 총재. [안성식 기자]

9일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기자회견은 짤막했다. 그가 한나라당 당사에 도착해 회견을 하고 당을 떠날 때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9분. 그는 기자들의 질문도 받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회견문엔 많은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그는 이날 한나라당의 불법 대선자금 문제는 모두 자신의 책임임을 거듭 강조했다. 지난해 12월 15일 대선자금 문제와 관련한 두번째 회견에서 밝힌 대로 "감옥에 가겠다"는 입장이 변치 않았음을 재차 확인했다. 그래서 '국법에 따른 사법처리'를 검찰에 요구했다.

동시에 그는 노무현 대통령의 동반 책임론을 제기했다. 그는 국법의 조속한 심판을 자청하면서 "盧대통령도 대의(大義)에 따라 스스로 판단하기 바란다"고 했다. 盧대통령도 불법 대선자금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만큼 응분의 책임을 지라는 얘기였다.

李전총재가 대선자금 문제와 관련해 盧대통령을 직접 겨냥한 것은 처음이다. 때마침 盧대통령 측의 불법 대선자금 규모가 일단 한나라당의 '10분의 1'을 초과한 것으로 나타나 李전총재의 회견은 盧대통령에 대한 야당의 공세에 힘을 실어주는 모양새가 됐다. 李전총재가 검찰의 수사 결과 발표 다음날을 회견일로 잡은 것도 盧대통령을 궁지로 모는 야당을 지원하겠다는 의도가 아니냐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李전총재는 종전의 회견과 달리 이번엔 검찰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검찰의 수사 결과를 보고 실망했다"거나 "수사가 공정하지도 못했다"고 했다. 그는 특히 자신과 盧대통령에 대한 수사를 총선 이후로 연기하겠다고 한 검찰의 결정에 강한 불만을 나타냈다. "검찰이 정치적 계산을 하고 있다"고 했다.

李전총재가 의도하는 것은 자신이 총선 전에 잡혀가는 것이다. 그래야 한나라당에 유리한 총선 분위기가 형성될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그 같은 상황은 여권에는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총선 전까진 李전총재를 그냥 놔두는 게 최선"이라는 게 여권의 입장이다. 그런 마당에 李전총재에 대한 수사가 총선 후로 연기됐으니 여권으로선 나쁠 게 없다. 그동안 검찰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李전총재가 이날 다른 태도를 보인 것은 이 때문이다.

이상일 기자<leesi@joongang.co.kr>
사진=안성식 기자 <anses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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