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명도씨탈출기>13.끝 姜成山총리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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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존경하는 강성산(姜成山)총리 아버님! 제가 평양을 떠나 그리운 사람들과 이별한지도 어느덧 1년반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저는 그동안 어느 한 순간도 장인어른과 처자식,그리고 부모 형제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물론 아버님께서 처자식과 부모형제를 버리고 달아난 놈이 무슨할말이 있느냐고 질책하실줄 압니다.
그같은 질책에 대해 저는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때문에 그동안 죽을 생각도 여러번 한 것이 사실입니다.그러나 저는 내 한몸 죽는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그후 저는 조국통일을 위해 제 모든 것을 다 바치겠다고결심했습니다.왜냐하면 통일을 앞당겨야 부모형제를 볼 수 있는 날이 단 하루라도 앞당겨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버님,저는 서울에서 기자회견 뒤 아버님과 가족형제가 해코지를 당하지나 않을까 가슴 졸였습니다.그러나 그간 신문을 통해 아버님 소식을 대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그러나 지금도마음을 다 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특히 늙으신 어머님을 생각하면 지금도 밤중에 잠 못이루고 눈물을 흘리곤 합니다.마음같아서는 지금이라도 옆구리에 날개를 달고 휴전선을 훨훨 넘어 평양 인흥동 집으로 달려가 어머님 품에안겨 평펑 울고만 싶은 심정입니다.자기를 낳아주 고 키워주신 부모님을 생각않는 자식이 어디있으며 또 자식을 사랑않는 부모가어디있겠습니까.저는 아직도 학창시절 공부를 잘해 훌륭한 사람이되라고 하시던 어머님의 말씀이 귀에 들려오는듯 합니다.
아버님,제가 조국을 떠나게된 것은 저 하나만 잘 살고 자유.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가 결코 아닙니다.
저는 아직도 지난 92년10월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당시 아버님은 당중앙위정치위원회에 참석하신뒤 저를 데리고 17시간이나걸려 청진에 가셨지요.그때 아버님께서 전용기차안에서 여러 말씀을 들려주셨지요.특히 조국이 처한 어려움을 토로 하시면서 동구사회주의권 국가들이 붕괴한 지금 살아남을 길은 오직 자본주의 나라들과 무역을 강화,더 많은 외화를 벌어들이는 것밖에는 다른방법이 없다고 강조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그때 저는 아버님 말씀을 들으면서 달러를 한푼이라도 더 벌어파탄지경에 빠진 우리 경제를 살리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저는 당초 중국에 출장나와 아버님과 약속한대로 열흘안에 일을끝내고 평양에 돌아갈 작정이었습니다.그러나 일이 뜻대로 풀리지않았습니다.게다가 일본에 사는 친척도 중국에 온다고 연락이 왔습니다.그결과 본의 아니게 출장 기일을 좀 어 기게 됐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그 보고가 과장돼 지도자동지(金正日)에게 올라갔습니다.내가 행방불명됐다는 보고를 받은 지도자동지는 『누가 총리 사위를 출장 보냈는가.당장 국가보위부를 시켜 찾아오라.만일 남조선으로 뛸 기미를 보이면 현장에서 즉시 암 살해버려』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북경에서 연길로 돌아오는 도중 이 소식을 전해들은 저는 배알이 불끈 치솟았습니다.그래도 불쌍한 조국을 위해 애쓰는 사람을상을 주지는 못할망정 죽이라니 세상에 이런 법이 있나.순간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조국을 떠날 결심을 한 것입 니다.
아버님,지금 우리 조국 남과 북 모두가 중요한 역사의 갈림길에 서있습니다.김정일 동지가 한국을 배제한채 미국에 매달려 영구분단을 추구한다면 자멸을 초래할 것입니다.또 한국도 민족의 뜨거운 동포애로 북한을 감싸지 못한다면 그 또한 민족의 도리를다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지도자동지가 일부 남한 국민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바보도,히스테리도 아닌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지도력도 있고 머리도비상한 사람입니다.저는 아버님께서 지금이라도 지도자 동지로 하여금 대담하게 「남북한 화해와 협력의 시대」를 열도록 정책 보좌하는 것이 민족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버님,저는 통일의 날이 그리 멀지않았다고 생각합니다.또 뵈올 그날까지 건강하시고 통일을 위해 더욱 애써주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그동안 변변치 않은 제 글을 실어주신 中央日 報와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1995년5월13일 못난사위 강명도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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