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8. 첫 무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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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8군 무대에서 노래하던 시절의 필자.

다 합쳐 봐야 3개월 남짓이었던 견습단원 시절. 하루라도 빨리 무대에 서고 싶은 마음에 얼마나 조바심했는지 모른다. 강요하는 사람도, 시키는 사람도, 봐주는 사람도 없었지만 날마다 혼자서 노래 연습을 했다. 프랭크 시나트라, 로즈마리 클루니, 도리스 데이, 패티 페이지 등 외국 가수들을 흉내 내기도 하고 그들과 달리 내 스타일대로 노래를 불러보기도 했다.

미8군 쇼에서는 외국 팝송을 불러야 했기 때문에 영어 공부도 게을리 할 수 없었다. 틈틈이 공부했다. 학창 시절부터 즐겨 듣던 외국 팝송을 외워서 따라 불렀던 터라 발음에도 꽤 자신이 있었다.

“나는 곧 유명한 가수가 될 거야! 반드시 큰 가수가 돼서 큰 무대에 서는 날이 올 거야!” 수없이 다짐하고 마인드 컨트롤을 했다.

어느 날, 지루하기 짝이 없는 견습생활이 2개월 정도 지났을 때였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베니 김 쇼’의 최고 가수였고 베니 김 선생의 부인이기도 했던 이해연씨와 듀엣으로 무대에 서게 됐다. 듀엣이기는 했지만 ‘베니 김 쇼’의 간판스타였던 이씨는 항상 쇼의 피날레를 장식한 가수였다. 후일 ‘단장의 미아리 고개’를 불러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진 그 사람이다.

이씨는 당시 30대 중반이었지만 체격도 좋고 성량도 풍부했다. 타고난 가수였기 때문에 후배 단원들에게는 우상이나 다름없었다. 더욱이 견습단원이었던 나로서는 감히 올려다볼 수조차 없는 그야말로 ‘하늘의 별’이었다. 당시 내 가슴을 설레게 했던 첫사랑 베니 김 선생의 부인이었으니, 내게는 선망과 질투의 대상이기도 했다.

최고 쇼에서 최고 스타와 피날레 곡을 부르게 됐다는 생각에 얼마나 들떴는지 모른다. 환한 조명이 무대를 비추기 시작하자 깜깜했던 객석이 여명처럼 서서히 밝아왔다. 객석은 발 디딜 틈 없이 빽빽하게 차 있었고, 여기저기서 환호성과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무대 아래에서는 20대의 건장한 미군들이 환호와 박수로 그들 나름의 젊음과 열정을 발산하고 있었다.

노래를 다 부르고 나자 열광적인 박수가 터져 나왔다. 우리가 무대에서 내려와 대기실로 들어갈 때까지 박수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드디어 무대의 참 맛을 알게 된 것이다. 관객의 반응이 뜨거우면 뜨거울수록 무대에 선 가수에게는 더욱 큰 힘이 솟아난다는 것을 몸으로 느꼈다.

또 하나의 목표가 생겼다. “어서 빨리 솔로 가수가 되어야지! 해연 언니보다 더 유명한 가수가 돼 저 우레 같은 함성과 박수를 한 몸에 다 받아야지!”

새로운 목표를 정하고 나니 끝이 없을 것 같아 지루하기만 했던 견습생활이 다시 활기를 띠고 즐거워졌다. 이해연씨와 듀엣으로 무대에 오르는 새 몇 달이 흘렀다. 그리고 1959년 1월, 내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는 또 한 번의 기회가 왔다.

패티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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