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8군 무대에서 노래하던 시절의 필자.
미8군 쇼에서는 외국 팝송을 불러야 했기 때문에 영어 공부도 게을리 할 수 없었다. 틈틈이 공부했다. 학창 시절부터 즐겨 듣던 외국 팝송을 외워서 따라 불렀던 터라 발음에도 꽤 자신이 있었다.
“나는 곧 유명한 가수가 될 거야! 반드시 큰 가수가 돼서 큰 무대에 서는 날이 올 거야!” 수없이 다짐하고 마인드 컨트롤을 했다.
어느 날, 지루하기 짝이 없는 견습생활이 2개월 정도 지났을 때였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베니 김 쇼’의 최고 가수였고 베니 김 선생의 부인이기도 했던 이해연씨와 듀엣으로 무대에 서게 됐다. 듀엣이기는 했지만 ‘베니 김 쇼’의 간판스타였던 이씨는 항상 쇼의 피날레를 장식한 가수였다. 후일 ‘단장의 미아리 고개’를 불러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진 그 사람이다.
이씨는 당시 30대 중반이었지만 체격도 좋고 성량도 풍부했다. 타고난 가수였기 때문에 후배 단원들에게는 우상이나 다름없었다. 더욱이 견습단원이었던 나로서는 감히 올려다볼 수조차 없는 그야말로 ‘하늘의 별’이었다. 당시 내 가슴을 설레게 했던 첫사랑 베니 김 선생의 부인이었으니, 내게는 선망과 질투의 대상이기도 했다.
최고 쇼에서 최고 스타와 피날레 곡을 부르게 됐다는 생각에 얼마나 들떴는지 모른다. 환한 조명이 무대를 비추기 시작하자 깜깜했던 객석이 여명처럼 서서히 밝아왔다. 객석은 발 디딜 틈 없이 빽빽하게 차 있었고, 여기저기서 환호성과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무대 아래에서는 20대의 건장한 미군들이 환호와 박수로 그들 나름의 젊음과 열정을 발산하고 있었다.
노래를 다 부르고 나자 열광적인 박수가 터져 나왔다. 우리가 무대에서 내려와 대기실로 들어갈 때까지 박수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드디어 무대의 참 맛을 알게 된 것이다. 관객의 반응이 뜨거우면 뜨거울수록 무대에 선 가수에게는 더욱 큰 힘이 솟아난다는 것을 몸으로 느꼈다.
또 하나의 목표가 생겼다. “어서 빨리 솔로 가수가 되어야지! 해연 언니보다 더 유명한 가수가 돼 저 우레 같은 함성과 박수를 한 몸에 다 받아야지!”
새로운 목표를 정하고 나니 끝이 없을 것 같아 지루하기만 했던 견습생활이 다시 활기를 띠고 즐거워졌다. 이해연씨와 듀엣으로 무대에 오르는 새 몇 달이 흘렀다. 그리고 1959년 1월, 내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는 또 한 번의 기회가 왔다.
패티 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