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승 공천위원장의 '희생 공천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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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박재승 위원장이 이끄는 통합민주당 공천심사위원회는 ‘공포의 외인구단’으로 불린다. 12명의 위원 가운데 7명이 시골 의사, 시인, 재야 사학자같이 비정치인들이다. 민주당의 기성 정치인들은 외인구단에 부담을 느껴 왔다.

박 위원장은 “뇌물, 알선수재, 공금횡령, 정치자금, 파렴치범, 개인비리, 기타 모든 형사범 가운데 금고 이상의 형이 확정됐던 사람은 심사에서 제외한다”고 공천 기준을 밝혔다. 이 기준에 따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아들인 김홍업 의원과 박지원 비서실장, 노무현 전 대통령의 측근인 안희정씨와 이상수 전 노동부 장관, 정동영 전 대통령 후보의 후견인 격인 이용희 국회부의장 등이 줄줄이 탈락 위기에 몰렸다. 거물들을 탈락의 벼랑 끝에 세운 건 일반 시민의 눈길을 끌기에 족하다. 흥행엔 성공한 듯하다.

박 위원장은 “나름대로 억울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큰 일이 있을 땐 억울한 사람의 희생을 밟고 가는 게 역사다”라고 ‘희생 공천론’을 폈다. 당사자들의 반발엔 이해 가는 측면이 있다. “내 주머니를 채운 개인 비리가 아니었다” “성직자를 뽑는 것도 아닌데 도덕적 잣대를 과잉 적용했다”는 항변들이 그렇다. 그렇다 해도 박재승의 ‘희생 공천론’은 나름대로 국민 설득력을 얻고 있다.

공천엔 국민에게 감동을 주는 드라마가 있어야 한다. 시민들은 그 나물에 그 밥인 정치권의 얼굴을 교체하고 싶어한다. 변화와 새로움을 향한 욕구다. 지역주의나 다선의 기득권에 기대어 정치적 수명을 연장하려는 모습에도 눈살을 찌푸린다. 민주당 공심위의 방침은 시민들의 이런 갈증을 어느 정도 풀어주는 측면이 있다. 대통령 선거에서 참패한 민주당은 개헌저지선인 국회 의석의 3분의 1이라도 얻을 수 있을까 걱정하던 처지였다. 박재승 위원장의 ‘희생 공천론’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나온 것이다.

희생 공천론은 한나라당에도 교훈이 될 것이다. 한나라당 공심위는 아직 국민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고 있다. 한나라당이 기득권 지역인 TK(대구·경북), PK(부산·경남)에서 희생 공천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게 국민 감동 드라마의 갈림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