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책읽기>쓰지 히토나리著 "클라우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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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직장이란 나의 자아를 실현하는도구가 아니라는 것을(소외),또 나는 자본가의 자아를 실현하는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을(착취)말했다.
하지만 「잘 살아보세!」를 부르짖으며 보릿고개를 넘기에 바빴던 한국인에게 직장은 자신의 행복을 가장 확실하게 보증하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리고 여우같은 아내,토끼같은 자식이라는 속어가 말해주듯이 가정은 직장에서 상처받은 만신창이 남편과 아빠를 위무하는 신성한 도피처였다.
양귀자의 『원미동 사람들』,박영한의 『우리는 중산층』,이선의『행촌아파트』는 모두 지상의 방 한칸을 얻고 꾸미는 어려움,곧중산층으로 진입하는 과정의 고단함과 기쁨을 찬양했다.
승진과 아파트 평수가 중요한 화제인 우리들에게 이 소설은 낯설다. 탄탄한 중소기업의 사장이 어느날 일하는 것이 싫증 났다는 이유로 부랑자가 되다니!그러나 높은 임금보다는 더 많은 여가를 원하는 젊은이들은 「거지가 되면 스물 네 시간을 멋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유혹에 솔깃할지 모르며,가정이 지친 심신의휴식처가 아니라 축적의 최소단위로서 나의 억압을 가중시키는 출발점이라는 것을 깨닳은 가장은 다음의 일화에 공감할 것이다.
『어떤 택시 운전기사가 그러더군,한밤중에 어개를 축 늘어뜨리고 혼자 서 있는 샐러리맨이 제일 태우기 싫다고.손님,다 왔습니다라고 하면,느닷없이 우는 치들도 있대.집앞에까지 와서,집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다.가족들이 나를 괴롭힌다.이 대로 들어가면 나를 죽일지도 모른다.제발 부탁이니 어딘가 멀리 데리고 가달라….』 낯설다고는 했지만,언제부터인가 한국에서도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고 할 때의 제가를 거부하는 소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하일지의 『경마장을 위하여』,신이현의 『숨어있기 좋은 방』같은 장편과 박인홍의 단편 『명왕성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는동일한 주제를 다룬다.
또 요즘 자주 언급되는 신세대 문학가운데 많은 작품들은 부모와 가족이 아예 배제돼 있다는 점에서,그리고 혼자사는 젊은 주인공들이 대체로 자유직에 종사한다는 점에서 가정과 직장을 중요시하지 않는 새로운 세대의 시대 감각을 드러낸다.
한국문학이 직장과 가정의 의미를 묻는 새로운 도전을 하는 사이에 쓰지 히토나리의 주인공은 도쿄의 도심 도로 중앙선을 차로질주하며,반문하며,사라진다.
「만약 진화에 끝이 없다고 하면,그렇다면 오로지 신으로부터의메시지(DNA)를 자손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만 우리들은 존재하는것인가.아이를 만들지 말자,반역자로 죽자」.신이 진화를 명령했는지 아닌지는 끊임없는 논란거리지만,「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풍만하라(창세기 1장28절)」는 신 최초의 명령을 위배한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모험에 값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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