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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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영상(映像)예술의 대표격인 영화가 처음 등장했을 때 다른 분야의 예술인들은 한결같이 영화라는 이름의 예술 메커니즘을 경멸했다.완전한 형태를 갖춘 독립된 예술로 간주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특히 문학인들의 영화에 대한 경멸은 가혹할 정도였다.영화가 다른 예술은 영상으로 재현하거나 그 예술형태를 모방하는 것이 가능할는지 몰라도 문학의 특성만큼은 침범할 수 없지 않느냐는 것이 그 이유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문학인들의 그같은 태도는 많은 변화를 보였고,오히려 몇몇 작가들은 그들의 작품에다 영상기법을 원용함으로써문학과 영상예술의 거리를 좁히기도 했다.마르셀 프루스트나 제임스 조이스 혹은 버지니아 울프 같은 작가들이 「 의식의 흐름」등 기법에서 영화의 커팅이나 페이드 인(fade-in)따위를 연상케하는 수법을 차용(借用)한 것이 좋은 예다.
반면 영화는 초창기부터 그 소재를 문학에서 찾기 위해 부단히노력해 왔지만 이 두 분야의 예술은 어차피 융화될 수 없는 운명에 놓여있었다.그 까닭은 문학이「서술(敍述)의 예술」인데 반해 영화는「움직임의 예술」이기 때문이다.가령 인 간의 내면 의식을 표현하는 경우 문학의 서술방법은 무한대일 수 있지만 영화가 그 주제를 영상에 옮기기 위해 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움직임 뿐이라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영상예술이 문학으로부터 차용할 수 있는 것은 문학작품,이를테면 소설의 표면에 나타나는 전체적인 줄거리,그리고 움직임으로써 표현해 낼 수 있는 최소한의 감춰진 주제에 불과하다는것이 통설(通說)이다.TV를 비롯한 다른 영상매 체도 마찬가지다.그렇게 보면 문학이 영상매체에 제공할 수 있는 가장 소중한요소는 바로 소설의 줄거리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문학쪽의 입장에서 보면 영상매체에 제공되는 소재 자체가 재산인 셈인데,그 소재를 저작권자의 동의없이 차용했다면 두말할 나위없이 재산권 침해다.워낙 TV매체가 다양해지고 다원화하다 보니 방송쪽이나 드라마작가들은 소재를 찾아 헤매다 본의든 본의 아니든 국내외 작가들의 작품을 슬쩍 베껴먹는 일도 곧잘 발생한다.
서울지법이 한 변호사의 소설을 표절한 드라마작가에게 1천만원배상판결을 내린 것은 영상매체에 제공되는 문학작품의 중요성을 새삼 강조한 사례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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