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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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남편이랑 딸이랑 셋이서 저녁 식탁에 마주앉기가 얼마만인가.
식탁에 풍요로움이 가득히 피는 듯 했다.이 조촐한 풍족감.
경제적인 풍요만이 풍요가 아니라는 것을 길례에게 가르쳐준 이는 이웃 한약방 할아버지였다.
지족자부(知足者富).
큼직하게 붓글씨로 쓴 화선지를 길례 공부방으로 들고 왔었다.
『노자(老子)말씀이니라.』 방문에다 손수 붙이며 할아버지는 말했다.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만족할 줄 모르면 가난한 자요,옹색한 생활 속에서도 스스로 족함을 느끼고 사는 사람은 참부자라는 뜻이지.』 사춘기 소녀가 가난 타박하는 기미를 눈치챘는지 할아버지는 누누이 글귀 설명을 했다.
족함을 아는 자가 부유한 자다.
그럴듯한 말이라 생각했다.그러나 「족함」이란 무엇인가.정신적인 데서 빚어지는 것이 「족함」이다.정신적으로 늘 굶주린 자가어찌 여유로움에 눈뜰 수 있단 말인가.
결혼 살림살이에 쪼들리면서 이따금 「지족자부」글귀를 떠올렸다.그러나 그때마다 몸부림을 느꼈다.
지금 이 식탁에 괸 풍요감.이것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길례가 정신적인 여유를 찾은데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 여유는 또 어디서 온 것인가.
『웬 꽃을 이렇게 많이 사왔니?』 길례는 딸에게 물었다.
『제가 사온게 아니라 아버지가….』 『연옥아!』 남편이 말렸으나 한 발 늦었다.
『아버지가?』 길례는 귀를 의심했다.
『허,참.얘기하지 말랬잖아.』 『죄송해요,아버지.하지만 저는저렇게 무지막지하게 사진 않거든요.』 길례와 연옥은 식탁에 엎대어 숨차게 웃었다.이렇게 실컷 웃어보는 것도 얼마만인가.
『그래도 얘,백합은 제대로 사오셨다.』 길례는 어느새 남편을편들고 있었다.
길례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 백합이다.
「백합」(百合)은 한어(漢語)다.순수한 우리 옛말로는 「얼」이다.「얼이」라고도 했다.이 「얼이」가 일본에 가서 「유리」라는 백합을 뜻하는 일본말이 되었다.
「얼」은 애당초 「샘」을 뜻한 우리말이다.맑은 샘물이 힘차게치솟았다 쏟아져 내리는 분수 모습은 흡사 백합화 모양새다.얼 모양같다 해서 백합은 「얼」「얼이」라 불린 것이라 한다.
얼마나 시적(詩的)인 낱말인가.이렇게 아름다운 우리말을 제쳐두고 굳이 한자말을 쓰는 까닭을 길례는 알 수 없다.
연옥의 결혼 예식 꽃다발도 백합화,아니 새하얀 얼꽃으로 해주고 싶다.
『참,결혼식 날짜 빨리 정해야지.』 길례는 연옥을 돌아봤다.
『그 일 때문에 지금 다녀온 거예요.어머니가 정해주신대로 5월 마지막 일요일로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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