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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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제2부 불타는 땅 꽃잎은 떠 물 위에 흐르고(22) 눈가를 넘친 눈물이 볼을 타고 천천히 그의 입가로 흘러내려왔다.움켜쥔주먹으로 얼굴을 닦으면서 명국은 더욱 더 이를 악물었다.바닷바람에 섞이면서 화순이 유서에서 마지막 했던 말이 웅웅거리며 그의 귀를 스쳐갔다.
더 살아야 할 게 내게는 없었습니다.하루 사는 게 결국은 하루 더 그 남자를 욕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개같은 세상.겨우 명국이 이를 갈듯이 중얼거렸다.어째 너는 그렇게 지지리도 복이 없었더냐.언제 하루 뽀송뽀송 마른 날을 못보고 그래 그렇게 궂은 날만 살다 간다는 거냐.이 미련한 년아. 고개를 숙이면서 명국이 뜻없이 고개를 저었다.복이 없는 게 아닌지도 모르지.네가 네 팔자를 그렇게 만들어 간 건지도 몰라.그까짓 거.길남인들 네가 어떻게 사는 여잔지 모르는 것도아닌데,이 얼띤 것아,죽기는 왜 죽는단 말이냐.죽는 다고 이제까지 산 게 씻겨진다더냐 없어진다더냐.
몸을 돌린 명국은 바람을 등지고 방파제 밑을 걸었다.화장터와납골당만이 있다는 무인도.병색이 완연한 얼굴로 화순이 하염없이바라보고 있던 그 섬쪽으로 명국은 발길을 옮겨놓고 있었다.그랬던 거로구나.그 때 이미 너는 일이 이렇게 될 것을 준비하고 있었던 거구나.나도 나일 헛먹었어.그 때 그애 얼굴에서 어쩌자구 그걸 읽지 못했는지 몰라.
하긴 나도 그애를 몰랐던 거지.독한 아이라고는 생각했는데 그게 사는 쪽으로 독할 줄 알았지 누가 죽는 걸 생각할 정도로 독할 줄이야 알았나 말이야.걸음을 멈추면서 명국은 퍼렇게 자라있는 풀밭 저편으로 저녁빛 속에 떠 있는 섬을 바라보았다.
그놈이 있었더라면 어떤 얼굴을 할까.길남아 네 이놈아.아까운여자 하나 물귀신 되어 떠나갔는데 네놈이 무슨 갈매기더냐.어디가서 끼룩끼룩 날고 있더란 말이냐.살아 있는 너나 나나… 이놈아,부끄러워해야 할 건 바로 너나 나나 살아 있 다는 거다.미물같은 것들,짐승도 아니겠고.어두워 오는 바다를 등지고 절룩거리며 돌아가면서 명국은 다짐하고 있었다.
나라도 있으니,염려말거라.뒷수발해서 태워 주마.살아서 욕된 거 다 잊고 가거라.훌훌 벗어던지고 가거라.어디 가서 무엇이 된들 이보다야 못하겠느냐.다 네 전생에 무슨 업이 있어 그랬느니 생각할 거다.너야 이제 풀려난 몸이 아니냐.이 육신이 쇠사슬이고 이 몸뚱어리 하나가 부러진 날개 아니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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