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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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제2부 불타는 땅 꽃잎은 떠 물 위에 흐르고(18) 『그럴 땐,말은 좋다고 하는게 아니라,말은 청산유수네 하는거다.이것들이 뭘 알아야지.한잔 들구려.추우면 들라구.』 술병을 잡은 채야마구치가 실실 웃었다.
『내가 속을 줄 알고? 네가 바로 이런 식으로 내 친구를 곯아떨어지게 했지? 그리곤 조선놈을 두 명이나 도망치게 했던 거구!』 『잘도 아네.알면 됐네 뭐.오늘은 한 스무명 꾸러미로 도망을 칠 거니까…넌 이제 죽었다.』 히엑,입에서 바람 새는 소리를 내면서 야마구치가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화순이 야마구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나저나 그 전지불 좀 끌 수 없어? 그러고 있으면 네가 여기 앉아 있는 줄 사람들이 다 알잖니!』 『아,그거야 그렇구만!』 『오늘 밤 한 스무명이 도망을 갈텐데 그러면 넌 어떻게되지? 나야 또 잡혀가서 죽든 살든 그거야 문제가 아니지만,보아하니 넌 처자식도 있을 것 같은데?』 『농담이겠지.』 중얼거리면서 야마구치가 술병을 잡았다.
『에라 모르겠다.바람도 불고 하는데,나도 한모금 마셔야겠다.
』 『미친 놈.좋은 술을 옆에 놓고 웬 바람타령은,바람이 뭐 널 보고 술 마시라고 분다든.』 킬킬거리면서 화순이 다 타들어간 담배를 버리고 새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야마구치에게도 한 개비를 내밀었다.꿀꺽거리며 술을 삼키고 나서 야마구치는 몸을 부르르 떨며 손을 내저었다.
『술은 해도 담배는 못배웠다.』 술을 꿀꺽거리는 야마구치의 옆에 앉아서 화순은 길게 담배연기를 뱉어내며 캄캄한 바다를 내다보았다.그래 많이 살았다.집 나와서 떠돈 세월…뒤집어서 헤아려 볼 것도 없이,화순아 이년아,너 참 많이도 살았다.
전생에 무슨 죄가 많아서 어찌 그걸 다 겪어냈더란 말이냐.왜놈들 등쌀도 그래 많이도 견디며 살았다.차이면 차이는대로 밀리면 밀리는대로 그렇게 살아왔지만 무슨 여한이 있는 것도 아니다.그래도 요 왜놈들 망하는 걸 보는 날까지는 살아야 하는데 내가 그걸 기다리 기가 너무 힘이 들어.
알이 그냥 알이던가.뒷날에 새가 되는 게 알이다.그런데 왜놈물러가는 거 보는 날 기다리기가…청산에 매 띄워놓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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