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Story] 외환위기 때 ‘을의 굴욕’ 당했던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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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 김진만 투자사업팀장. 1999년 그는 6년차 직원이었다. 국제입찰팀 대리였던 그에게 그해 겨울은 혹독했다. 캠코는 그해 첫 해외 로드쇼에 나섰다. 외환위기로 부실화한 국내 자산들을 헐값에라도 팔아치우기 위해서였다. 당시 캠코는 ‘을’, 외국인 투자자는 ‘갑’이었다. 미국과 유럽을 오가는 로드쇼는 말 그대로 ‘길거리 구걸’이나 다름없었다. 관심 없다며 배짱을 부리기 일쑤인 미국의 투자은행(IB) 등을 “일단 얘기나 들어보라”며 애걸하다시피 불러모았다. 그들의 입맛에 맞춰 국내 부실 자산을 이리저리 짜깁기했다. 그런 식으로 외국인 투자자들은 부실 자산 중에도 알짜만 쏙 빼갔다. 그리고 불과 몇 년 뒤 외국인 투자자들은 이를 몇 배나 비싼 값에 되팔아 큰 이익을 챙겼다. 그렇게 팔려나간 부실자산이 99년에만 3조6450억원어치였다.

그리고 10년이 흘렀다. 김 팀장은 지난달 28일 미국 뉴욕의 JFK공항에 내렸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로 위기를 맞은 미국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서였다. 캠코는 최대 1조원짜리 펀드를 만들어 미국 부실채권을 사들일 계획이다. 이번엔 캠코가 ‘갑’, 미국의 투자은행들이 ‘을’로 바뀌었다.

공항엔 미국 5대 투자은행 중 하나인 A사에서 보낸 리무진이 대기 중이었다. 월스트리트에 자리한 A사의 본사엔 파트별 글로벌 헤드들이 촘촘히 ‘면담’ 일정을 잡아놓고 김 팀장 일행을 기다렸다. A사 임원들은 이틀에 걸쳐 미국 모기지 시장 동향과 A사가 보유한 부실채권 규모, 캠코와의 합작사업 등에 대해 입술이 마르도록 열심히 설명했다. 10년 전 국내 부실 자산을 팔기 위해 김 팀장이 했던 바로 그 일이었다.

30일엔 강행군을 해야 했다. 면담 요청이 줄을 이었기 때문이다. 뉴욕에서 코네티컷주까지 북쪽으로 날아가 채권 회수 회사를 방문한 뒤 다시 비행기를 타고 미국 동부의 최남단인 플로리다주로 내려와 모기지 회사를 찾아갔다. 플로리다 방문은 서브프라임 충격이 상대적으로 큰 그곳의 모기지 회사 요청으로 급하게 잡힌 일정이었다. 김 팀장 일행은 이날 점심 끼니를 걸렀다. 한 최고경영자(CEO)가 “조금만 더 설명하겠다”며 그들을 붙잡았기 때문이었다. 김 팀장 일행은 이날 밤 미국을 가로질러 로스앤젤레스로 넘어와 다음날부터 이틀간 캘리포니아 지역 모기지 회사들을 방문했다. 김 팀장이 방문한 모기지 회사 네 곳은 모두 2000억 달러 안팎의 자산을 가진 미국 내 업계 랭킹 10위권 회사들이었다. 네 곳 모두 CEO가 임원들과 함께 나와 김 팀장 일행을 맞았다. 사업 현황도 CEO가 직접 설명했다. “어떤 정보기술(IT) 인프라가 깔려 있느냐” “어떻게 다른 곳보다 채권 회수를 잘할 수 있느냐” 등 캠코 측의 질문에 정성을 다해 대답을 내놨다. 이들은 금융회사의 핵심 사항인 전산 시스템까지 일부 공개했다.

김 팀장 일행은 5일간 A사와 모기지 회사들로부터 ‘귀빈’ 대접을 받았다. 그들에겐 최대 1조원을 투자하겠다는 캠코가 구세주나 다름없는 데다 110조원의 부실채권을 정리해 본 캠코의 경험도 절실했기 때문이다.

캠코는 이번 투자를 통해 외환위기 이후 치른 비싼 수업료를 되찾아 오겠다는 각오다. 이철휘 캠코 사장은 “캠코가 세계 부실채권 및 구조조정 시장에 진출하는 전환점으로 삼겠다”고 말했다. 김 팀장은 “한국 경제가 외국 자본에 매번 당하기만 한다고 우려했던 이들에게 우리도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덧붙였다.

이상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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