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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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남편과 시누이 언저리의 낌새가 이상했으나 길례는 별로 마음쓰지 않았다.원래 사분사분한 사람들은 못된다.연옥의 혼사일로 좀서운해하는 것이려니 했다.결혼식 준비 때문에 자질구레하게 따로신경쓸 겨를이 없어 다행스러웠다.
날마다 저물어서야 집에 들어가곤 했다.종종걸음으로 돌아오며 이건 영락없는「정읍사」마지막구절 꼴이다 싶어 혼자 웃었다.
『내가논 졈그세라』 「정읍사」의 이 마지막 구절을 요즘의 맞춤법으로 고쳐 쓰면 『내 가는데 점그랄세라』가 될 것이다.『내가 가는데 날이 저물까 염려됩니다』의 뜻이라 한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하니 이상했다.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다.
시장에 간 것은 남편이다.그렇다면 「님 가는데 점그랄세라」라고나 했어야 할 것을 어째서 「내 가는데…」라 한 것일까.혹시해석이 잘못돼 있는 것은 아닐까.
「내 가는데」의 「내」는 「나」를 가리키는 「내」가 아니라 「나루」의 「내」를 뜻한 것일지도 모른다.
「님이 배타고 나루를 가는데 날이 저물까 염려됩니다」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옳지 않을까.
그렇게 풀면 앞뒤가 딱 맞아 떨어진다.정읍(井邑)은 더군다나예부터 강.호수.우물로 이름난 물고장이 아니던가.
『달하 노피곰 도샤…』 길례는 「정읍사」를 첫 구절부터 요즘말로 옮겨 다시 읊조려 봤다.
『달아 높이곰 돋아사 어기어 멀리곰 비춰오시라 어기어 어간 좋으리 아으 자롱지리 전 저재 열어신고요 어기어 진 데를 디뎌올세라 이기어 어간 좋으리 어느기 다 놓고시라 어기어 내 가는데 점그랄세라 어기어 어간 좋으리 아으 자롱지리』 장터에 간 남편을 염려하는 아내의 노래다.
『달님이시여 높직이 돋으시어 멀리까지 두루 비춰 주십시오.시장은 열렸습니까.내 님이 진 데를 디디고 올까 염려됩니다.
어느 것이든 놓아버리고 오십시오.내를 건너는데 날이 저물까 염려됩니다』라고 풀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겉껍질 노래를 해석한 데 지나지 않다.속노래가 그 겉껍질 노래 밑에 또 포개어져 있는 것이다.
이 속노래는 사뭇 야하다.
여기서의 「내」는 자기 자신을 말하는 「나」의 뜻으로 쓰이고있다.그리고 「졈그세라」는 「물에 잠길까 염려된다」라는 뜻으로사용되어 있다.
똑같은 소리의 낱말을 교묘히 활용하여 이중으로 노래하고 있는셈이다. 『내 가는데 잠길세라…』 절정에 이르러 애액(愛液)이흥건히 넘쳐흐르는 정황을 표현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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