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회색 양복의 건장한 신사가 서 있었다.「나체총각」이었다.
예대로의 다부진 인상이지만 희끗희끗한 머리카락 탓인지 한결 품위있는 모습이다.
『참 오랜만입니다.』 자동차 부속품 제조업을 하고 있다던가.
소박하면서도 정중하다.
젊은 원장이 그 뒤에 서 있다가 서글서글하게 인사한다.부자가어울려 보였다.
왕년의 「나체총각」,박사장은 우물바닥의 나물 바구니를 손수 들고 길례를 안채로 인도했다.안정된 그 동작에,자신있는 가장의권위가 풍겼다.
남자란 나이를 제대로 잘 먹으면 이렇게 변신할 수도 있는가 싶었다.그것은 작은 감동이었다.
『오월 안으로 혼례 올리도록 해.혼수한답시고 요란 떨 거 없네.남의 집 보배 단지 얻어오는 건데 그 이상의 혼수가 어디 있겠나!』 노마님은 서둘렀다.
『누님 말씀이 옳습니다.기왕에 양가가 합의한 것,되도록 빨리실속있게 치러주도록 하십시다.』 신랑감 아버지도 현실론으로 뒷받침했다.
길례 혼자 처져있는 느낌이다.
『아이 아버지와 상의해서 연락 올리겠습니다.』 보나마나 이 일로 남편과 한판 씨름을 벌여야 할 판이다.
『제가 한번 어르신을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사업하는 사람의 빠른 감각으로 박사장이 제의를 했다.하기는 남자들끼리 해결토록 하는 것이 첩경일 듯하다.
그날 밤 남편은 갑작스런 출장 때문에 내려왔다면서 부산에서 전화를 했다.그것도 길례 모녀가 없는 사이 「녹음전화」를 한 것이다. 계획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당장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자신의 소재처를 알려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몸살 난 것처럼 팔 다리가 쑤시고 무거웠다.
이튿날 아침 화장실에서 길례는 자기 눈을 의심했다.
속옷에 선홍색 단풍잎같은 자국이 묻어있다.설마 했지만 달거리였다.그 새 반년이나 넘게 몸하지 않다가 이게 웬일인가.
남편과의 밤 생활이 끊긴 후로 덩달아 쓸려간 썰물은 난데없이돌아와 선홍색 홍수처럼 넘쳤다.
폐경(閉經)은 갱년기(更年期)의 여자 누구나가 겪는 생리현상이다.그러나 쉰도 채 못되어 폐경을 맞은 길례는 적잖이 충격을받았었다.
내 여자의 일생도 이로써 마감된 것이거니 생각하면 허망하기 그지 없었다.
그 사라진 달거리가 되돌아온 것이다.그 간의 중단을 만회라도하듯 양도 많았다.
이것이 혹시 병이 아닌가.
갑작스런 단풍빛깔의 당도에 길례는 곤혹스럽기만 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