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5면

제2부 불타는 땅 비내리는 나가사키(29)저쪽에는 일본인들이살고 있었군.망연히 서서, 지상은 아이들이 사라져간 일본인 마을의 지붕들을 바라보았다.뒤쪽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넌 뭐야?』 새로 온 자신들을 인솔해서 작업장인 땅굴 공사판으로 데리고 가는 일을 맡았던 일본인이었다.군화에 각반을 찬그가 가죽채찍을 든 채 걸어내려왔다.저벅저벅 그가 다가오는 발소리가 쿵쿵거리며 무거운 돌이 놓이듯 지상의 가슴에 와 떨어졌다. 『함부로 혼자 다니지 말라고 했잖아.여기가 너 놀러온 덴줄 아나?』 구레나룻이 거뭇거뭇한 그가 채찍을 내흔들며 눈을 부라렸다.이를 악문 채 지상은 고개를 숙이고 각반을 찬 그의 발밑을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처음이라 잘 몰랐습니다.』 『조선놈과 북어는 두들겨야 한다더니,네 눈으로 봐서 알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런 것도 하나하나 말을 해야 하나.』 아침부터… 그야말로 재수 옴 붙는군.
오늘은 처음으로 터널 안으로 들어가 일을 한다고 했는데,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걱정이다.
허리를 굽신거리며 지상은 그의 옆을 지나 숙소로 향하는 비탈길을 걸었다.사람들이 말하던 일본,바로 그 일본에 이제야 온 기분이군.씁쓸하게 입맛을 다시면서 지상은 어제 만난 길남을 떠올렸다. 『아파도 일 못 나간다는 게 없어.그러면 그냥 잡아다때려.맞아죽느니 바다 밑으로 기어내려가는 게 차라리 낫지.사무실이라고 지하에 있는데 그건 일종의 취조실이고 고문하는 데야.
들어갔다하면 병신되어서 나오지 않으면 다행이야.그렇게 해서 죽으면 낙반사고니 뭐니 처리해 버리고 태워서 뼈쪼가리 몇 개 항아리에 넣으면 그만이야.죽어서밖에 나오지 못한다는 거기에도 지금 조선사람이 몇 백명 있어.여기서 먹는 건 그래도 진수성찬이다. 정어리 삶은 거에 콩.조가 뒤섞인 걸 먹으며 산다.하루 몇 개 조로 나뉘어 교대로 일을 하면서 말이다.일 끝내고 기어올라오자면 너 나 할 것 없이 탄가루를 뒤집어써서 반짝반짝 눈만 보이지.다들 걸레처럼 후줄근해져서 죽은 아버지가 살아 돌아왔대도 일어설 기운도 없이 흐느적거리며 걸어서 쉰내가 나는 다다미방에 와 널부러진다.그게 매일 계속돼.너 지금 뭐라고 했지.사람이기를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구? 신선이 따로 없으시군 그래.나는 왜 좀 너같이 살지 못했나 모르겠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