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해외칼럼

미 대선서 뒷전으로 밀려난 ‘외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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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놀랍게도 이번 선거에서 외교 문제는 유권자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다. 불과 6개월 전만 해도 이라크 전쟁이 미국 정치 지형을 뒤흔들고 있었음을 생각하면 뜻밖의 일이다. 지금도 여전히 이라크 문제가 많은 미국인의 뇌리에 남아있지만 선거에 미치는 영향력은 확연히 줄어들었다. 미군 사상자가 눈에 띄게 줄어든 때문에 뭔가 극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압력도 줄었다. 최근 이란이 2003년 이후 핵무기 개발을 중단했다는 미 국가정보평가(NIE) 보고서가 나오면서 이란과의 전쟁 가능성이 감소한 것도 외교 정책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줄어든 한 원인이다.

게다가 주요 후보자 간에 외교 정책과 관련한 무언의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는 점도 작용하고 있다. 후보들은 적어도 한동안 미군이 이라크에 주둔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기후변화를 막기 위해 미국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점에도 동의한다. 아프가니스탄이 또다시 혼란으로 치닫지 않도록 미국이 유럽의 우방들과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데도 뜻을 같이하고 있다. 주요 대선 후보 중 누구도 미국의 국제적인 고립주의를 주장하는 이는 없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불안한 미국 경제가 외교 이슈를 덮어 버린 데 있다. 많은 미국인이 은행 대출금을 갚지 못할 위기에 처해 있다. 올해 미국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문제는 전쟁이 아니라 경기후퇴·실직·고유가 등이다.

그러나 이런 이유로 인해 외교 문제가 선거의 중심에서 비켜나서는 안 된다. 당장 외교적으로 민감한 불법 이민자 문제는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이슈다. 현재 불법 이민자에 대한 반대 여론이 거세지고 있지만, 지난 몇 년 동안 불법으로 일해 온 사람이나 장차 미국에 이민 오고 싶어하는 사람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한 합의는 없다.

공화·민주 양당의 정책에서 세계화에 대한 우려는 눈에 띈다. 경기가 나빠짐에 따라 외국과의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후보들의 개인적 경험과 관련한 논의에서도 외교 정책에 대한 잠재적 우려가 드러난다. 대선 캠페인 여기저기서 ‘변화’라는 말이 울려 퍼지고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대외 환경에서 극적인 변화가 있을 경우 외교 문제는 언제든 다시 주요 관심사로 떠오를 수 있다. 불과 한 달 전 파키스탄의 베나지르 부토 전 총리가 암살당했을 때 이런 변화를 경험했다. 민주·공화 양당 후보들은 국제 테러조직인 알카에다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을 붙잡거나, 파키스탄의 핵개발을 억제하기 위해 어떤 준비를 할지 설명해야 할 상황에 놓일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이라크 역시 시아파와 수니파 간 해묵은 갈등이 재연될 경우 다시 주요 문제로 부상할 수 있다.

핵문제가 아니더라도 미국과 이란이 전쟁에 돌입하는 상황도 배제할 수 없다.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이 실정에 따른 국내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위기를 조장할 수도 있다. 이 밖에 미국인에 대한 갑작스러운 테러 공격 감행 등도 배제할 수 없다.

미국의 차기 대통령이 직면할 외교적 도전은 무궁무진하다. 차기 대통령은 어떻게 이러한 도전에 대응해 나갈 것인가. 그러나 지금 당장 외교 문제는 미국인의 부차적인 관심사일 뿐이다.

리처드 하스 미 외교관계협의회(CFR) 회장
정리=이수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