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책을 말한다] 비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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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이승훈(62.사진)씨의 열세번째 시집 '비누'에는 1.2.3부마다 한편씩 모두 세편의 표제시가 등장한다. 1부에 실은 '비누'에서 시인은 "비누는 가늘게 내리는 가랑비"라고 진술한 후 "비누는 마루에 있고 거실에 있고 화장실 거울 앞에 있지만 비누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라고 묻는다.

2부 '비누'에서는 "비누는 배추가 아니다 그러나 가을 아침 햇살에 젖는 비누는 푸른 배추 배추밭에 바람 불고 배추가 피를 흘린다"고 노래한다. 요령부득이다. 3부의 '비누'에서 궁금증이 좀 풀린다.

"비누를 보면 보는 것이고 만지면 만지는 것 손을 씻으면 손을 씻는 것 발을 씻으면 발을 씻는 것이다 무슨 말이 필요하라?""비누의 길이 삶의 길 비누와 함께 비누를 따라 비누 속에 살자! 비누는 매일 사라진다"

비누라는 대상은 나의 의도에 따라 여러가지로 활용될 수 있고, 그 쓰임에 따라 다르게 규정된다. 비누의 길은 삶의 길, 비누는 매일 사라진다고 했으니 삶은 비누거품처럼 매일 사라지는 어떤 것일 게다.

그럼 1부의 '비누'를 '삶은 마루에 있고 거실에도 있다'고 읽을 수 있을까? 2부의 '비누'는 여전히 난해하다.

이씨는 '대상을 지워버린 시기→'나'라는 자아를 지워버린 시기→언어를 지워버린 시기'로 변천해온 시력을 소개했다. 이번 시집은 2년 전부터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된 결과가 반영된 것이라는 설명이 뒤따랐다.

언어와 지시 대상이 자의적으로 연결돼 있다는 주장은 구조주의 언어학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씨는 '있는 것도 없고 없는 것도 없다'는 불교적인 맥락으로도 '비누'를 읽을 수 있다고 밝혔다. 언어와 대상 사이의 끈을 끊어버리면 비누가 가랑비나 젖은 배추가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이씨는 "시도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따져야 하는가, 결과나 목적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시 쓰기 아닌가"라고 말했다.

이씨는 "이번 시집에서는 비슷한 시들끼리 분류하고 순서를 배열하는 구성조차 피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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