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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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시험을 마치고 나타난 상원이의 표정이 밝았다.상원이는 곧장 덕순이와 내가 앉은 자리로 오지 않고,우리에게는 손만 흔들어 보이고는 공중전화로 가서 매달렸다.
『쟨 마마보이라구.정말이야.』 덕순이가 웃으면서 그랬는데,그리 기분 나쁜 얼굴이 아니었다.
『홀어머닌데 당연하잖아.효자가 결국 좋은 남편이 되는 거라더라 뭐.』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그애들이 무지 부러웠던 게 사실이다.그 애들은 처음은 나빴지만 중간은 괜찮은 편이고 끝은더 좋을 것 같았다.그런데 나하고 써니는…시작은 좋았지만 중간은 엉망이었고 끝은 더 나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신촌으로 가서 칵테일 소주를 마셨고,낙지볶음에 공기밥을 시켜서 비벼먹었고,나중에는 영석이와 승규까지 합세해서 록카페에 가서 춤도 추고 그랬다.
『언제 하영이는 봤니.』 음악소리가 따가웠기 때문에 덕순이가내 귓가로 고개를 기울이고 큰소리를 냈다.나는 그냥 고개만 저었다.그거면 대답이 될 것 같아서였다.
『희수는? 같은 학교잖아…?』 나는 또 고개를 가로저었다.덕순이가 묻는 의미의 만남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그리고나서 내가 악을 쓰면서 덧붙였다.
『가끔 학교에서 얼굴이야 봤지만….』 다들 많이 취했는데,나는 문득문득 써니 때문에 슬펐지만 전체적으로는 나쁘지 않았다.
상원이는 본고사도 자신이 있다고 큰소리를 쳤다.나는 써니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집에 들어서니까 어머니가 쪽지 한장을 내밀면서 목소리를 낮췄다. 『전화가 여러번 왔었어.목소리가 좋지 않던데….』 써니는전화벨이 한번을 채 끝까지 울리기도 전에 전화를 받았다.그렇지만 말은 하지 않고 울기만 하다가 겨우 말했다.
『그날은 내가 잘못했어.내가 미쳤었나 봐.』 『넌…정서불안이야.지금도.』 『알았어.니가 뭐라고 그래도 좋아.제발…미워하지만 마.』 써니와 나는 그날밤 세 시간도 넘게 통화를 계속했다.어쩌면 서로 얼굴이 보이지 않는 전화가 아니었다면 중간에 서로 열을 받아서 그렇게 길게 말하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써니는 미국에서 아빠와 둘이 지낸 생활을 아주 쓸쓸하게 말했고,목사까지 쳐도 사람이 여섯명밖에 모이지 않아서 아주 썰렁했던 아빠의 장례식 광경을 다시 말했고,텅 빈 집에 돌아와 이틀동안이나 창가에 앉아 있었다는 이야기도 했다.
나는 써니가 왜 엄마부터 찾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두 시간쯤 말했다.전화를 끊고 나서,나는 어쩌면 써니를 누군가에게 떠넘기기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지껄였던 것은 아닐까 하고 자문해 보았다. 써니는 다음날 나하고 같이 서교동의 집으로 갔다.써니 엄마에게는 내가 미리 전화를 해두었으므로,초인종을 누르자 곧 써니 엄마가 달려나왔다.모녀는 서로 얼싸안고 십오 분쯤 흐느껴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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