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오동 천년, 탄금 50년 65. 국악과 이삿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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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교학과장을 맡고 있던 1981년 8월 완공, 입주한 이화여대 음대 건물.

이화여대 음대에 교수로 부임한 1974년. 국악과 시설은 한 칸짜리 내 방이 전부였다. 연습실은 물론 교습할 방도 증설되지 않은 상황이어서 음대 학생들이 복도에서 레슨을 받는 일까지 생겼다. 이후 4년 동안 국악과 교수는 나 혼자였다. 국악과 과장 직을 내가 6년간 도맡았다. 문교부 장관을 지낸 최규남씨의 부인 김순영씨가 이 딱한 사정을 들었던 모양이다. 그는 남편과 사별한 뒤 전 재산을 이화여대에 기부했다. “국악과를 위해 써 달라”는 것이 조건이었다.

 이 돈을 종자돈 삼아 건축비를 마련해 지하 1층, 지상 6층의 커다란 새 음대 건물을 지어 이사한 것이 81년 8월이다. 당시 나는 음대 교학과장을 맡고 있었다. “보직은 절대로 맡지 않겠다”고 버티다 별수없이 3년을 약속한 것이다. 새 건물에 각 과를 배정하는 것이 교학과장의 임무가 됐다. 6층짜리 건물에 조그마한 엘리베이터가 달랑 한 개. 악기나 실어 나를 정도였다. 게다가 속도가 느린 구식이었다. 각 과에서는 높은 층을 쓰기가 힘들다며 서로 낮은 층을 사용하려고 은근히 힘겨루기를 했다.

 나는 꾀를 냈다. “아래층은 편리한 대신 위층은 전망이 좋다. 그러니 일장일단이 있다”고 설득해 의외로 손쉽게 과 배정을 마쳤다. 사실 5층과 6층에서는 멀리 한강까지 내려다볼 수 있어 속이 시원했다. ‘국악과는 몇 층을 쓰는 것이 좋을까’. 서양악기와 같은 층을 쓰면 서로 소리가 충돌해 좋지 않을 것 같았다. ‘도서실이 있는 2층과 붙어 있으면 좀 더 조용한 환경에서 음악 공부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국악과와 비교적 소리를 덜 내는 작곡과를 3층에 배정했다. 4층에는 성악과와 관현악과, 5층에는 피아노과, 6층에는 종교음악과가 들어왔다.

 교수실 배정도 내 몫이었다. 장점이 있으면 단점이 있는 인생의 리듬이 여기에도 있었다. 모든 교수실은 남향과 서향으로 나뉘었다. 남향 방은 햇볕이 많이 들어 겨울에 화초를 키울 수도 있는 대신에 크기가 작았다. 서향 방은 넓었지만 여름에 덥고 겨울엔 추웠다. 무조건 남향 방을 좋아하던 교수들은 이 조건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서 나는 일단 나이가 많은 순으로 방을 고르게 했다. 방의 장단점을 잘 알고 있는 교수들은 아무도 불평하지 않고 자기 순서대로 방을 골랐다.

 이화여대 음대는 현재 두 개의 연주홀을 가지고 있다. 그중 1층에 있는 ‘김영의홀’에는 파이프 오르간도 있다. 다른 하나는 지하층에 있는 ‘국악연주홀’이다. 김순영씨가 국악과를 위해 기부금을 냈기 때문에 이 홀을 국악전용으로 하게 된 것이다. 지금 이화여대 국악과에는 여섯 명의 교수가 있다.

 서울대 국악과처럼 이화여대 국악과도 초창기에는 양악을 하다 대학 입시에 낙방한 학생들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다. 이제는 시설과 실력 모두 갖춘 국악과로 자리 잡았다.

황병기<가야금 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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