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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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주선이라는 여자애는 하염없이 흐느껴 울었다.나는 어느 정도 달래보다가 지쳐서 그 옆에 멍하니 앉아 담배를 한 대 피워 물었다.그러고 있자니 이탈리아 작가가 쓴 어떤 소설의 한 장면이떠올랐다.
남자 주인공이 길을 가다가 역 근처에 쪼그려 앉아 울고 있는여자애를 보고 다가가서 「울지 마,울지 마」그렇게 딱 두 번 말하는데,그것으로 여자애는 완전히 그 남자의 여자가 된다는 이야기였다.
어쨌든 주선이에게는 그런 게 통하지 않았다.내가 아마 스무 번은 울지 말라고 그랬지만 그애는 나를 완전히 무시한 채 계속해서 눈물을 짜대고 있었다.나는 아 이게 도대체 무슨 경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정체 모를 여자옆에 앉아서,내 가 왜 그 여자의 울음이 멎기를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건지를 생각하니까 마침내 짜증이 나고 말았다.
『미안하지만… 난 가겠어.난 널 울리지 않았으니까.그리구… 우린 아직 친구도 뭣도 아니니까.그리구… 사실 난 이런 식으로… 여길 뜨면서 변명해야 할 이유도 없다구.』 도서관에서 교문앞의 버스 정류장까지는 걸어서 십분 남짓 걸리는 거리였다.아무생각없이 혼자 걷기에는 약간 지루한 거리였고 그렇다고 무언가를생각하면서 걷기에는 아는 얼굴들과 너무 자주 마주치는 길이었다. 내가 교문근처에 이르렀을 때였는데 누군가가 뒤에서 클랙슨을울렸다.차가 지나가기 좋게끔 내가 길을 비켜주었다.
내 옆을 지나던 차의 운전석에서 주선이라는 여자애가 빵끗 웃고 있었다.안경을 써서 새롭게 보이는 주선이 차창을 내리고 말했다. 『내가 잘못했어요.안 울게.타요.』 『아냐.난 버스 타고 가면 되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걸음을 계속하려는데 갑자기 주선이 소리쳤다.
『안 운다고 그랬잖아.화내지 말고 타란 말이야.』 나는 기가막혔지만 하여간 얼른 차에 올라탔다.
무슨 망신을 당할지도 모를 일이었다.눈이 부어서 안경을 쓴 거라고 주선이 말했지만 나는 심통이 나서 입을 다물고 차창 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주선이 나를 싣고 간 곳은 압구정동 골목의 경양식집이었다.
테이블에 촛불이 놓인 구석진 곳에 마주 앉아서 내가 말했다.
『왜 나한테 이러는 거지.임신이라도 시킨 남자를 대하듯이 말이야.』 주선이 쿡쿡 웃었다.어쨌든 주선이 웃어대니까 나도 기분이 어지간히 풀어졌다.저녁을 들면서 주선이 자기가 처한 입장을 말했다.마치 막 혼자 보고 나온 영화 스토리를 말하듯이.
『강신했다는 게 뭔지 알아요?』 두 달 전에,주선이에게 신이내렸다는 거였다.그래서 주선이는 무당이 돼야 할 팔자라고 했다.처음에는 정신을 잃고 신경정신과에도 찾아가보고 그랬지만 아무소용이 없었다고 했다.용하다는 무당이 주선이의 부모에게 결론을내려주었다고 했 다.
『무당을 안시키면 반 년을 못살아.』 주선은 웃음을 머금은 얼굴을 하고 이야기했다.
『가령 말이야,널 도서관에서 봤을 때 이런 장면이 불쑥 떠오른 거야,네가 쓴 소설이 신문에 실렸어.또… 떠나갔던 애인이 돌아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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