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있는아침] ‘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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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강’- 이성복(1952~ )저렇게 버리고도 남는 것이 삶이라면

우리는 어디서 죽을 것인가

저렇게 흐르고도 지치지 않는 것이 희망이라면

우리는 언제 절망할 것인가

해도 달도 숨은 흐린 날

인기척 없는 강가에 서면,

물결 위에 실려가는 조그만 마분지조각이

미지(未知)의 중심에 아픈 배를 비빈다


‘삶’과 ‘희망’ 그리고 ‘절망’이라는 낡은 단어들을 가지고도 이런 시를 쓸 수 있다니. 시인이란 단어 몇 개만 가지고서도 천변만화를 일으킬 수 있는 존재다. 누구나 강물 위에 떠가는 작은 마분지 조각을 볼 수 있지만,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지는 못한다. 미지의 중심에 아픈 배를 비빈다니. 우리는 사소한 존재이지만 언제나 인생이란 강물에 의미 있는 흔적을 남긴다. 그것이 쓸쓸하고 아프더라도 그 기척은 아름답다!

<박형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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