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세계화와 외국인근로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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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에는 병자호란당시 청나라에 포로로 잡혀가 중국에 정착한 한국인촌에 대한 기록이 있다.
마을의 위치는 만리장성의 동쪽끝 산해관(山海關)에서 북경(北京)으로 가는 중간쯤 풍윤(豊潤)이란 작은 도시의 서쪽 10리,마을이름은 고려보(高麗堡)다.
『마을에 이르니 집들이 모두 띠이엉을 이어서 몹시 쓸쓸하고 검소해 보였다….벼를 심고 떡이나 엿같은 물건이 본국의 풍속을많이 지녔다.옛날에는 본국의 사신이 오면 하인들이 사먹는 술 밥값을 받지 않는 일도 없지 않았고 그 여인들도 내외하지 아니하며 말이 고국 이야기에 미칠때에는 눈물짓는 이도 많았다.그러나 하인들이 이를 기화로 여겨 마구잡이로 주식을 토색질해먹는 일이 많을 뿐더러 그릇이며 의복을 요구하는 일까지 있으며 주인이 지키지 않으면 도적질까지 하므로 점차 우리나라 사람들을 꺼려 사행이 지날때마다 주식을 감추고 팔지 않으며 간곡히 청하면팔되 비싼값을 달라고 하고 혹은 값을 먼저 받기도 한다.
그럴수록 하인들은 백방으로 속여서 그 분풀이를 한다.그리하여서로 상극이 되어 마치 원수보듯하며 이곳을 지날때면 반드시 큰목소리로「너희놈들 조선사람의 자손이 아니냐.너희 할아버지가 지나시는데 어찌 나와 절하지 않느냐」하고 욕지거리 를 하면 이곳사람들도 욕지거리를 퍼붓는다.그러므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도리어이곳 풍속이 극히 나쁘다하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었다.』 연암이고려보를 지난 것이 1780년,병자호란이 있은지 1백40여년후니 당시의 고려보 사람들은 모국에서 강제이주당한 조선인의 4,5대 후손쯤이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2백여년뒤「세계화」를 국정의 지표로 내세운 첫해 서울 한복판에서 외국인 근로자들이 추위속에 피켓을 들고 시위와 농성을 하고 있다.「때리지 마세요」「성폭행하지 마세요」「우리를짐승취급하지 마세요」.
최소한의 인간대접을 해달라는 이들의 항변을 들으면서 우리는 낯이 뜨거워진다.모두가 한국인임을 부끄러워해야 할「反문명 상황」을 언제까지 방치할 것인가.
외국인 근로자의 불법취업 문제는 뒤집어보면 우리가 그만큼 살만하게 되었다는 얘기고 우리나라만의 문제도,요즘 와서 갑자기 제기된 것도 아니다.
나라마다 정책의 차이가 있고 외국인 근로자를 내국인 근로자와똑같이 처우하는 나라도 사실은 없으나 기본적 인권의 보장은 문명국가의 기본규범이다.
외국인 근로자의 문제를 단순히 경제적 관점에서만 보는 것은 단견일 뿐 아니라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경제적이지도 못하다.
무엇보다 우리나라에 와있는, 공식집계로만 8만4천여명을 헤아리는 외국인 근로자의 40%이상은 법적으로만 외국인일뿐 넓은 의미에서 우리 민족공동체의 일원인 중국교포들이란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잘산다는 모국에서 돈을 벌어보겠다는 일념으로 천신만고끝에 입국해서는 온갖 고초를 마다 않는다.
그리고 그중 많은 수가 모국에서 경험한 비인간적 대우 때문에모국에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떠난다는 조사결과가 있다.2백여년전 연암이 개탄했던 고려보의 사연을 오늘에 그대로 되풀하는 셈이다. ***현실에 맞게 고쳐야 이번 성남 외국인 근로자 폭행사건을 계기로 정부의 외국인 근로자 대책이 현실에 맞도록 보완돼 한국에 왔던 근로자들이 적대감을 품고 돌아가 반한(反韓)감정이 국제적으로 확산되는 사태만은 막아야 한다.특히 중국교포에대해서는 민족공동 체의 장래와 관련해 별단의 대책이 필요하다고본다.고려보의 전철을 밟아선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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