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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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희수는 내가 여름방학 동안에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지낸 것과자신의 여행이 본질적으로는 같은 행위라는 말도 했다.
『너는 방 안에 틀어박혀 있었고 나는 지구를 돌면서 낯선 사람들 틈을 헤집고 다녔다는 게 다를 뿐이지 뭐.우린 그러니까 그동안에 각자가 혼자라는 걸 확인하고 싶었던 거라구.』 나는 엉뚱하다는 걸 알면서도,아까 희수가 하던 말을 아는 척하고 묻지 않았던 걸 결국 물어보았다.
『그런데…섹스가 황폐해질 수도 있다는 건 알겠어.그게 윤찬이하고 니 관계와 무슨 관계가 있어?』 『아직 마실 만큼 물이 고이지를 않았었거든.손바닥에 말이야.하여간…그 이야긴 그만하는게 좋겠구…,달수 넌 나 만나서 좋으니?』 희수가 방긋 웃었다.그럴 때면 희수는 정말이지 매력적이었다.
『나는 희수 너를 만나면 자유같은 걸 느껴.그리구….』 난 희수가 만들어 주는 음식이 맛있다는 말도 했는데,그러자 희수는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끌었다.희수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슈퍼마켓이었다.내가 슈퍼의 장바구니를 들고 희수의 꽁무니를 따라갔고 희수가 음식재료들을 골라서 바구니 에 던져 넣었다.계산은 희수가 했고 내가 슈퍼 봉투를 들고,희수는 곧장 자신의 오피스텔로 나를 데려갔다.오피스텔 방문에 열쇠를 꽂으면서 장난처럼 투덜거렸다.
『기껏 멍달수나 먹이려고 요리학원에 다닌 건 아닌데 말이야….』 희수는 카레라이스에 된장국을 해주었는데,그건 내가 카레라이스를 좋아한다는 걸 감안해서 택한 메뉴였을 거였다.
『커피물 좀 올려놔.』 적당히 설거지를 마친 희수가 내게 말하고는 사라졌는데 곧이어 샤워 소리가 들렸다.나는 담배를 피워물고 텔레비전을 보면서 언제쯤 돌아가는 것이 적당할까 하고 잠깐 생각해 보았다.
욕실에서 나온 희수에게서는 그야말로 비누냄새가 풍겼다.희수의풍성한 머리는 아직 젖어 있어서 전등불 빛에 반짝이며 윤을 내고 있었다.그애는 내가 타놓은 커피잔을 들고 컴퓨터 앞에 가서앉았다. 『어디 보자…그동안에 얼마나 벌이가 됐는지.』 희수는주식시세를 확인하고 있는 거였다.모니터를 능숙하게 때리니까 종목별 시세가 모니터에 나타났다.
『이거봐.이 지랄같은 여름에 에어컨 만드는 회사 주식이 오르지 않을 리가 있겠느냐 이거지.이번 학기 등록금은 걱정 안해도되겠어.』 나는 희수의 등뒤에 서서 한동안 주식시세라는 걸 들여다 보고 있다가 조그맣게 말했다.
『나…갈래.밥도 잘 먹었구….』 희수는 한동안 아무 반응이 없었다.모니터 화면에 비치는 나를 살펴보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희수가 갑자기 탁 하고 어떤 키를 치니까 화면이 꺼져버렸다.그리고도 한동안 희수는 나를 뒤돌아보지 않았다.나도 현관쪽으로 발걸음을 옮기 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한순간 희수가 뒤돌아서 나를 올려다 보다가 말했다.희수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가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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