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공직자가 물러나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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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공직에서 물러난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세상이 달라져도 한참 달라진 느낌이다.
무엇보다도 당장 갈 곳이 없다.면도를 하고 옷가지를 챙겨 입었건만 어디를 가려고 그랬는지 모를 일이다.
순간 서울을 훌쩍 떠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의아해 하는 주위의 눈초리를 뒤로 하고 터미널로 향했다.그러나 어디로 갈 것인가부터가 문제였다.
산.바다,…이왕이면 높은 산,푸른바다가 있는 곳 동해로 가기로 정했다.혼자서 표를 사고,탑승구를 찾고,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서투르기 짝이 없다.차창에 몸을 비낀 채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갖가지 상념들이 꼬리를 문다 .
짧지 않은 공직생활,예상했던 것보다는 훨씬 큰 충격,섭섭한 마음,회한과 감사 등 여러 가지가 교차된다.
또한 차라리 바보가 되어,아니면 극기의 경지에 이르러 허허 거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싶다.탁 트인 동해의 수평선,싸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때 묻지 않은 해변을 거닐면서 상당히 수그러들리라 믿었던 무거운 마음은 큰 차도가 없었다 .
병도 마음에서 나고 또 낫는다 더니 이해가 됨직도 하다.이열치열이라 했다.가급적 험한 산을 택해 산행을 시작했다.
아픈 다리,가쁜 숨,흠뻑 땀에 젖은 채 산위에 다다른다.납 같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다.
역시 苦는 苦로써 풀어야 하는가 보다.다 아는대로 삶은 유한하고 직장 또한 언제인가는 물러나야 한다.이 시점에 서게 되니진부한 이야기일지 모르나 공직자로서,직장인으로서 최선을 다해 후회 없이 일해야 한다는 점이 재삼 새롭다.
그리고 다른 일변에서는 갑자기 닥칠지도 모르는 퇴직후를 대비하는데도 소홀함이 없어야 하리라 본다.죽어 봐야 저승을 안다고했던가.지금의 회한을 다 옮길 수는 없지만 조금이라도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영성〈前과기처차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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