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개혁 속전속결 안 하면 관료 생존논리에 설득 당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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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직 인수위는 혼돈의 공간이다. 신(新).구(舊) 권력이 경쟁하고 갈등하고, 그러다 타협한다. 신권력 안에서도 암투가 있다. 신권력은 의욕에 넘치고 조급하기 십상이다. 그런 만큼 시행착오를 하기도 쉽다.

중앙일보와 동아시아연구원(EAI.원장 김병국)은 공동연구 차원에서 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 당선자의 인수 업무에 직.간접으로 간여한 6인의 옛날 실세들을 심층 인터뷰했다. 박철언 전 정무장관,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 전병민 전 청와대 정책수석 내정자, 이종찬 전 국가정보원장, 이광재 대통합민주신당 의원과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이다. 이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인수위 활동 때마다 생긴 문제점들을 정리했다.

#1. 공신들의 갈등

"당선자 주변에 갑작스럽게 사람이 몰리고 이들을 중심으로 인의 장막이 형성됐다. 제각기 일등공신이라고 자처하며 '실세 그룹'이 형성됐다. 고위 관료와 재벌이 앞다퉈 줄을 대려고 노력했다. 그때 권력을 추구하려는 인간의 본질과 '요물'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권력의 속성을 깨달았다."

노태우 정부에서 '6공 황태자'로 불렸던 박철언 전 장관이 한 말이다. 노 대통령과 직거래했던 박 전 장관과 집권당 실세들은 늘 갈등했다. 그 시작은 인수위 시절이었다. 노 당선자가 박 전 장관에게 청와대 핵심 자리(정책연구실장)를 주려고 하자 집권당 실세들이 반발했다. 양측의 갈등은 노태우 대통령에게 부담이 됐다.

1993년 2월, 전병민 전 정책수석 내정자가 중도하차한 이면에도 파워게임이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씨는 김영삼(YS) 당선자의 비선 라인이자 싱크탱크 역할을 한 '동숭동팀'을 이끌었다. 하지만 그의 발탁은 YS를 잘 아는 인사들에게 충격이었다. 내부 반발이 컸다. 불투명한 경력 등이 표면적 낙마 이유였지만 YS와 가까운 한 인사는 "전씨가 혜성같이 등장해 YS를 독점하는 자리를 맡게 되니 공신들로부터 공격 대상이 되기 딱 좋았다"고 말했다. 전씨는 심층 인터뷰에서 "권력 실세가 인수위나 청와대로 가는 건 대통령 스스로가 자신의 발목을 잡는 일"이라고 토로했다.

#2. 관료와의 갈등

"갈등이 있고 (개혁에) 피로한 사람이 있더라도 올바르게 합리적 절차로 매끄럽게 하면 된다. 개혁 그 자체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2003년 1월 노무현 당선자가 인수위원 임명장을 주는 자리에서 한 말이다. 인수위와 정부 부처의 갈등이 심화되자 노 당선자가 인수위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인수위 내에서도 당선자의 참모 출신과 관료 출신 간에 신경전이 벌어졌다.

이종찬 전 원장은 "인수위 내부 갈등을 해결하는 데 인수위 기간의 절반을 보내야 했다"고 토로했다. 그는 특히 정부 개혁을 두고 "속전속결하지 않으면 관료집단에 설득당해 오히려 관료의 수만 증가시킬 수 있다. 정부 개혁은 집권 1개월 내 해치워야 한다"고 조언했다. 남재희 전 장관은 "인수위원들이 관료집단을 견제해야 하는 건 맞다"며 "하지만 전문가 수준의 지식을 갖춰야 관료 논리에 대적하면서 한 단계 더 높은 사안을 추진할 수 있다"고 당부했다.

#3. 과거.미래 권력의 긴장

"현재 인수위 활동이 80년대 초반 국보위를 연상케 하는 감마저 주고 있다. 현 정권의 실정과 비리를 캐는 데 치중하는 것 같다."

98년 1월 홍사덕 전 정무장관은 김대중 당선자의 인수위를 비판했다. 국보위는 전두환 정권의 길을 닦기 위해 활동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가리킨다. 이에 대해 인수위 측은 "월권 행위를 한 적이 없다"고 맞섰다. 당시 인수위원장이던 이종찬 전 원장은 "여당에서 야당으로 정권이 교체될 경우 갈등 폭이 더 클 수밖에 없다"며 "인수위가 신.구 정권 간 갈등을 잘 통제하지 못했다"고 토로했다. "전임 정권의 과(過)를 지나치게 내세우면 새 정권 역시 권력의 뒤안길에서 똑같은 수모를 당한다"(박철언 전 장관)는 조언도 있다.

고정애.채병건 기자

◆EAI 연구진=김병국(고려대).강원택(숭실대).이홍규(한국정보통신대).임성호.정진영(이상 경희대).박세일.최병선(서울대) 교수, 서상민 연구기획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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