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혁칼럼>공론화과정의 중요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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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민주국가에서 정부가 하나의 정책을 결정하는데는 대충 이런 과정을 밟는 것이 상식적이다.먼저 누군가 문제 제기를 한다.장관이든 관료든,건의에 의해서든 누군가가 문제를 제기한다.다음엔 제기된 문제를 둘러싼 토론이 벌어진다.정부안에서, 각정당에서,언론에서,전문가그룹에서,일반국민 사이에서 활발한 토론이 벌어지고 그 결과 방향이 잡힌다.그쯤 되면 하나의 시안(試案)이 마련된다.시안이 마련되면 그 구체적 내용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다시 벌어지고 공청회등을 통해 검증되는 과정을 거친다.이런 보완과정을 거쳐 국무회의→대통령 재가로 시안은 마침내 정부안(案)이 된다.정부안은 국회토론을 거쳐 드디어 하나의 정책으로 확정된다. 문제 제기에서 확정되기까지 이런 일련의 공론화(公論化)과정을 통해 그 정책은 다듬어지고 세련되고,현실적합성을 확보하게 된다.또 이 과정에서 국민은 정책내용에 관해 소상히 알게되고 논의 과정에 직.간접으로 참여하게 됨으로써 정책의 국민적기반이 마련된다.
이런 과정은 길고도 복잡하게 보이지만 그만큼 정책의 성공 가능성을 높이고 정부의 부담도 덜어준다.다만 바쁘고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정부가 모든 정책을 다 이런 과정을 거쳐 결정하기는 어렵다.더러 긴급을 요하거나 보안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그러나그런 경우라도 정부는 사전에 공론화 과정을 못밟은 까닭을 국민에게 납득시켜야 하며 사후적(事後的)인 공론의 테스트는 피할 수 없게 된다.
정책의 공론화 과정이란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이런 공론화 문제에 대해 우리정부는 너무 감각이 무디고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얼마전 세계화가 갑자기 국정(國政)목표가돼 국민 지지를 받았지만 그 내용이 뭔지,어떤 내용이 돼야 하는지는 누구도 잘 몰랐다.심지어 정부 내에서조차 사전논의도,합의도 없었다는 얘기다.바로 그 얼마전까지는 국제화가 국정목표라고 정부에 추진기구까지 만들었는데 그 기구가 채 작업에 들어가기도 전에 세계화로 바뀌었다.국제화라는 국정목표에 대해서도 당시 국민 공감대가 형성됐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불과 몇달 사이에정부의 목표 수정에 따라 국민이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는 현상이 온 것이다.
국회 날치기가 있은 바로 다음날 전격발표한 정부조직개편도 마찬가지다.개편방향에 대해서는 야당까지도 지지하는 획기적인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좋은 정책이 지금 국회에서는 심각한 여야쟁점이 되고 있다.
30년만에 정부조직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치는 중대한 문제를 정부가 밀실작업 끝에 전격 발표하고 열흘안에 통과시켜 달라니 어떤 야당인들 호락호락 응할까.새정부조직법의 국회통과를 전제로 직제개편과 개각을 한다는 것이 정부 스케줄이지만 이는 다분히 일방적인 것이다.졸속심사는 안된다,시간을 두고 충분히 심의하자는 야당의 주장을 반박할 말이 없는 것이다.
정부조직개편은 물론 일정한 보안속에 할 일이다.그러나 안을 만드는 과정에서 이런 저런 의견이 나오고 수정.개선.보완하는 기회를 갖는게 더 바람직했을 것이다.최소한 여권(與圈)수뇌부간의 제한된 토론기회라도 있었어야 마땅했다.밀실작업 →전격발표→초고속 국회통과라는 방식은 공론을 형성하고 영향을 미칠 위치에있는 정부의 다른 기관.여당.야당.국회를 바지저고리로 만들게 된다. 정부의 극히 중대한 정책을 총리나 집권당 대표도 모르는방식으로 처리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가.알 사람이 모르게 되면 부작용이 반드시 온다.
공론화 과정이 무시됨으로써 정부는 결과적으로 조직개편안의 내용을 좀더 충실히 할 기회를 상실하게 됐다.非경제부처에 대한 개혁이 미미하다는 다수 여론의 지적이 그것이다.
***결정方法도 성패 좌우 이처럼 좋은 동기의 좋은 정책도 결정방법.추진방법에 따라 허점(虛點)이 나오기도 하고 성과가 달라지기도 한다.
『어떤 결정이 내려지는가 하는 문제 뿐 아니라 어떻게 결정되는가 하는 문제도 중요하다.
…대통령은 결정하기 전 그 문제에 대한 모든 의견을 들었는가.누가 그때 그 자리에 있었으며,있어야 할 사람중 누가 빠졌는가.』 제임스 레스턴이 어떤 정치가로부터 배운 중요한 것이 이것이라고 그의 회고록에 적고 있다.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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