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시간에 얽매여 팽개쳐진 정치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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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그동안 유달리 일그러진 모습만을 보여줬던 국회가 예산안 처리법정시한인 2일 또한번의 추태를 연출했다.민자당은 이날저녁 민주당의 저지를 교묘하고 치사한 방법으로 뚫고 새해 예산안을 날치기 처리했다.
황낙주(黃珞周)국회의장이 민주당의원들로부터 집중 견제를 받고있는 사이 이춘구(李春九)부의장이 국회 본회의장을 굽어보는 지방기자실로 들어가 예산안등 47개 안건을 기습처리한 것이다.李부의장의 안건 상정에서 가결 선포까지는 20여초 밖에 걸리지 않았다. 민자당의 날치기를 육탄으로 막으려고 본회의장에 들어가있던 민주당 의원들은 번갯불에 콩구워먹는 듯한 귀신같은 솜씨에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그저 허탈하고 놀란 표정으로 李부의장과민자당 의원들의 행동을 지켜봐야만 했다.
중앙기자실.방청석과 함께 본회의장을 내려다볼 수 있는 지방기자실에서 안건을 날치기 처리한 것은 헌정사상 초유(初有)의 일이다.권위주의 정권인 5,6共때 의장이 방청석으로 올라가 안건을 변칙처리하는 방안이 검토되기는 했다.그러나 막 상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국민의 눈이 두려웠던데다『방법이 너무 졸렬하다』는 자체 비판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일이 문민정권에서 일어났다.대도(大道)는 물론「세계화」와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태가 태연자약하게 저질러진 것이다.그런데도 민자당은 조금도 부끄러운 기색을 나타내지 않고있다.날치기 직후 낸 대변인 성명에서는 헌법준수 를 위해 잘한일이라고 자부했다.그리곤 민주당의 갑작스런 등원(登院)을 원망하면서 민주당이「없어져야 할 낡은 정치행태」를 부렸기 때문에 어쩔수 없었다고 책임을 전가했다.
아무튼 민자당은 헌법을 준수했다.그러나 그것으로 과연 제 할일을 다했다고 자처할수 있을까.야당도 아닌 집권여당이 법 준수라는 단 하나의 명제에만 매달린 끝에 정치력은 팽개치고 볼썽사나운 행위를 저질러도 되는 것인지 묻고 싶다.그 래가지고도 의회민주주의를 내세울수 있겠는가 말이다.
2일 하루만해도 민자당이 민주당과 협상할 시간은 충분히 있었다.물론 오랫동안 국회를 등진 민주당이 여전히 답답한 태도를 보였던 것은 사실이다.그러나 그렇다고 상대를 아예 무시한채 부실심의된 예산안을 날치기 처리한 것은 누가 보아도 옹졸했다.집권당임을 내세우려면 막판까지 화룡선(畵龍扇)처럼 넓은 포용력을발휘하는 노력을 기울였어야 했다.
지난해 날치기 시도에 이어 이번에도 같은 추태를 되풀이한 민자당이 민주당에『구태(舊態)를 버리라』고 책망할 수 있으려면 먼저 자신부터 달라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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