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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쟁이와 국가지도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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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그러나 민주주의가 아첨과 궤변에 능한 소인배가 득세하는 제도라고 생각해선 곤란하다. 우리보다 먼저 선거 정치를 실현해 온 선진국에서는 정치인을 ‘정치쟁이(politician)’와 ‘국가지도자(statesman)’로 나누어 부른다. 정치인이란 정치를 전문적인 업으로 삼고 사는 사람이다. 정치쟁이나 정치꾼은 그들 중 공익에 봉사하기보다는 사리사욕을 앞세우고 국가의 미래 대신 자신의 앞날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 사람을 지칭한다.

국가지도자란 진정 공공의 이익을 위해 헌신하고 국가의 미래를 준비하는 데 전념하는 인물을 말한다. 불행히도 수많은 정치쟁이 속에서 국가지도자를 찾아내는 일은 모래 속에서 진주를 솎아내는 것만큼이나 힘들다. 지도자의 자질을 가진 사람도 정치판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정치쟁이로서의 ‘기술’을 완전히 외면할 순 없기 때문이다.

1970년대 미국 국무장관을 역임한 정치학자 헨리 키신저는 “국가지도자의 의무란 경험과 비전 사이에 존재하는 괴리를 메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경험이 과거부터 내려오는 현실을 의미한다면 비전은 바로 미래의 청사진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을 무시한 비전은 백일몽이며 미래를 전망하지 못하는 현실주의는 시대에 역행하는 복지부동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대선에서 어떻게 정치쟁이와 국가지도자 감을 구분할 수 있을까. 나는 자신이 대통령으로 재임하는 5년간의 청사진만을 제시하는 사람보다는 10년, 20년 뒤 한국의 미래상을 보여주는 후보가 진실하고 유능한 국가지도자로서의 잠재력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21세기 대한민국은 해결해야 할 몇 가지 장기적 과제를 안고 있다. 그중 가장 시급한 것은 인구의 활력을 되찾는 것이다. 출산율을 획기적으로 늘리거나 젊은 외국인의 대량 이민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나라의 장기적 경제 전망은 밝지 못하다. 일본이 장기 불황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유도, 장기적으로 인도가 중국보다 경쟁력 있다는 분석도 모두 젊은 인구층의 비율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경제 발전과 환경 보전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는 것도 시급한 과제다. 태안 앞바다의 기름 유출 재앙은 현대사회가 추구하는 경제성장의 어두운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특정 사고는 우연히 발생한다. 하지만 사고를 초래하는 위협과 잠재력은 구조적으로 항상 존재한다. 이런 이유로 우연한 사고는 언제라도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환경을 고려하지 않는 경제 발전은 미래에 재난이라는 부메랑으로 되돌아올 것이다. 거대 이웃 중국의 고속 성장도 오염과 공해의 시한폭탄이다.

이번 대선 과정은 성년을 맞은 87년의 민주적 정치제도가 근본적으로 리모델링돼야 한다는 과제를 확인시켜 주었다. 우리 사회는 그동안 많은 변화를 겪었다. 21세기 민주주의는 대통령을 직접 뽑는 수준을 넘어 정당과 정책을 중심으로 의회의 역할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개선돼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비례대표제의 도입이나 정부·의회 관계의 재정립 등이 본격적으로 논의돼야 한다. 여소야대라는 비효율적 국면이 빈번하게 연출되고 대통령과 여당의 관계가 매번 흔들리는 근본적 원인은 현재의 정치제도에서 찾을 수 있다.

후보들은 모두 ‘내가 당선된다면’ 경제 성장률을 높이고 일자리를 창출해 국민의 소득을 높여 주겠다고 큰소리를 친다. 하지만 유권자는 이런 공약의 현실성은 차치하고라도 ‘내가 당선된다면’ 퇴임한 뒤 장기적으로 어떤 유산을 남길 것인지에 대해 먼저 듣고 싶다. 정치쟁이만 눈에 띄는 대선 캠페인 막판에 이마저도 부질없는 꿈일지 모르지만 말이다.

조홍식 숭실대 교수·정치외교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