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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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윤찬은 사학과 아이들에게 채소라를 꼭 데려오겠다고 큰소리를 쳐놨기 때문에 혼자 방으로 돌아가기가 뭣해서 어딘가에 가고 있던 중이었다고 했다.
『난 이 근처를 잘 아는 편이에요.울 아버지가 여기 스포츠클럽 회원이거든요.저 아래로 가면 보트들이 있는데…지금 가면 그걸 살짝 탈 수도 있을 거거든요.같이 가보실래요.이런 밤에 호수에 떠있어 볼 기회가 어디 흔하겠느냐구요.한 십 분쯤만 걸어가면 돼요.』 나는 소라의 눈치를 살폈다.소라는 파카 주머니에두손을 깊이 찌른 자세로 두 눈을 크게 뜨고 나와 윤찬을 찬찬히 번갈아 쳐다보았다.그러는 모습이 지독한 장난꾸러기처럼 보였다. 『좋아.가자구.히히히.』 이윽고 소라가 찬성했다.우리 셋은 그때부터 마음놓고 서로 반말을 해댔다.어두운 길을 휘파람 불며 나란히 열지어 걸으면서,모험길에 나선 것같은 분위기가 그렇게 갑자기 우리를 뭉치게 만들어줬을 거였다.
물 가까이에 가니까 찰랑이는 물소리가 들렸다.물소리를 들으면서 우리의 마음도 조금씩 찰랑거렸을 것이다.언제나 새로운 경험이란 으레 우리를 긴장시키는 법이었다.
먼저 물로 나갔던 윤찬이 어둠속에서 속삭였다.
『자 됐어.빨리들 와서 올라타라구.』 나하고 윤찬이가 소라의손을 양쪽에서 하나씩 잡아주었다.
『이 배가 윤찬씨 아버지 거라구?』 보트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소라가 물었다.
『누구 건지야 알게 뭐야.어차피 물 위에 떠있는 거니까 이왕이면 우리가 잠시 이용해주겠다 이거지 뭐.』 나와 소라가 나란히 앉았고 맞은편에 윤찬이 우리와 마주보고 앉아서 노를 저었다.사방이 정말이지 지독하게 고요하였고,그래서 노가 물에 잠길 때마다 나는 철썩철썩 물소리가 너무나 선명하게 들렸다.밤호수를,작은 배가,천천히 미끄러져 나 갔다.신입생 수련회가 싱거워 죽겠는 세 탈출자를 싣고.
소라가 목소리를 낮춰서 종알거렸다.
『옛날 영화중에 「무기여 잘 있거라」라는 게 있거든.거기서 주인공 남자하고 여자가 보트로 국경을 넘는 장면이 있거든.갈대가 우거진 호수였어.아니 강이었는지도 모르겠는데,하여간 소리내지 않고 물 위를 살살 흘러가는 장면이었거든.남자 는 록 허드슨이었어.왜 얼마 전에 에이즈 걸려서 죽은 사람 있잖아.여잔 몰라.난 남자배우만 보거든.』 윤찬이 호수 한가운데에서 노젓기를 멈췄다.보트가 물위에 떠서 제자리를 천천히 돌았다.윤찬이 점퍼의 지퍼를 내리고 소주병 하나를 꺼내서 뚜껑을 따고 한모금마셨다. 『자 달수도 한잔 해….난 그 영화는 못봤지만 소설은읽었어.헤밍웨이거잖아.마지막엔 여자가 애를 낳다가 죽잖아.』 『맞아.애 낳는 거 난 무서워.어우….』 소라가 말하고 나서,내가 한모금을 마시고 나서 손에 들고 있던 소주병을 빼앗더니 자기도 한모금을 들이켰다.
별과 초승달과 바람과 그리고 찰랑이는 물소리.소라가 또 소리를 냈다.
『산다는 거 정말 무서워.안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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