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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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수강신청 접수창구 앞에는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줄은 웬일인지 쉽게 줄어들지 않았다.
낯선 얼굴들이 대부분이었지만,어차피 앞으로 섞여지내야 할 상대들이라는 걸 서로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 서울역에서 기차표를 살 때 늘어서 있었을 때와는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서너 명씩 둥그렇게 서서 자기 소개를 하면서 악수들을 나눴고 ,그러면 서로 어쭙잖은 족보를 주워섬기다가 갑자기 친해지고는 했다.
『휘문이라면…그럼 근식이라구 알겠네.중학교 땐 야구부였는데….』 그러다 보면 근식이 하고 친했든 말든,남들이 모르는 근식이를 둘 다 안다는 공통점 하나만 가지고도 끼리끼리 친구의 친구가 되고 그러는 거였다.아니면 적의 적이라서 친구가 되기도 했다. 『신일 나왔으면 거 명식이라구 아주 성질 이상한 놈 몰라?』 『왜 몰라.그 놈이야 원래 승질 드러운 걸루 유명하잖아.』 간혹 재수나 삼수생이 끼여 있어서 분위기가 어색해지기도 하는 거였다.
『명식인지 하는 앨 내가 알 수가 없지.난 삼수했거든.』 『네에… 그러세요.』 줄이 빨리 빨리 줄어들지 않는 건 아이들이수강신청 요령을 잘 읽어보지 않고 대강 써낸 것들을 창구에서 하나하나 바로잡아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누가 그랬다.그거 하나 제대로 못써내는 녀석들이 어떻게 대학생이 됐는지 모르겠다고 다른 누구 하나가 그랬다.이거 정말 입시제도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또다른 누구 하나가 빈정거려서 몰려 서있던 우리가 다같이웃었다. 『근데 쟤 있잖우,채소라 맞죠?』 우리는 일제히 줄 뒤편에 선 여자애 하나를 쳐다보았다.빠알간 미니치마에 긴 가죽장화를 신고 머리는 생머리를 허리까지 늘어뜨린 계집애였는데,줄서 있는게 지루한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가 우리의 시선을 느꼈는지 구두코로 땅을 툭툭 걷어차고 있었다.
『맞어 맞어.무슨 탤런트 하던 여자애가 국문과에 들어왔다구 소문났더라구.거 국문과라구 그랬잖우,과를 잘 택해서 좋겠수다.
』 누구 하나가 나를 가리키면서 그랬다.
『나두 봤어.작년인가 재작년인가 무슨 사극에서 어린 기생으로나왔었잖아.와아 그때 보니까 정말 요염하대요.좃나 시하더라니까.』 그러고 보니까 나도 텔레비전에서 본 것같은 얼굴이었다.
어쨌든 줄은 차츰 줄어들었다.그 결과,수강신청 하나 제대로 못하는 것들을 욕하던 친구 역시 조교에게 이것저것 지적당하는 비극적인 현장을 우리는 지켜봐야 했다.
국문과의 첫수업 시간에는 여조교가 들어왔다.키가 아주 큰 여조교는 자신이 국문과의 선배이기도 하다고 자기소개를 하고는 신입생이자 후배인 여러분을 위해서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을 해주겠다고 그랬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이제는 대학생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는 거예요.아무도 여러분을 챙겨주지 않아요.각자 자기가 할 바를 결정하고 그 결정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거지요.수업에안들어 온다고 야단치는 사람은 없지만 3분의2이 상 수업에 참석하지 않으면 학점이 나오지 않아요.강의실 못찾는다고 누가 안내해주지도 않아요.동아리에 가입하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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