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오래가는 다리붕괴 후유증-탓 그만하고 다시 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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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검찰의 철야조사를 받고 나오는 前시장의 얼굴에는 초조한 빛이역연했다.30시간동안 조사를 받은 대기업 총수도 침울한 기색을감추지 못했다.비록 이들이 겉으로는 태연한 얼굴을 했지만 TV시청자들은 그 표정 뒤에 숨은 불안과 당혹을 쉽게 읽을 수 있었다.그들의 표정에서,그 주변의 술렁거림 속에서 오늘의 한국의고민을 읽은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바로 오늘 한국의 고민은 무엇인가.그것은「다리의 잘못」을 들춰내는 분위기가 너무 오래 지속돼 한국 사회 전체가 다리 붕괴의 충격과 후유증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과오의 시정은 시간이 오래 걸릴지 몰라도 그것이 누구 탓이냐 는 책임 규명은 빨리 마무리지어야 한다.오직 다리 문제에만 넋을 잃고 있다면 정말 못난 한국인이란 얘기를 듣게 된다.다리 말고 할 일이 얼마나 많은가.그런데도 우리는 아직까지 누구의 탓으로 돌리느냐는 문제에만 매달려 있다.
노블레스 오블리즈(noblesse oblige)라는 프랑스 말은 직역하면 귀족은 귀족답게 처신하라는 뜻이지만 높은 신분에는 의무가 따른다는 말로 전의(轉義)된다.신분제가 타파된 요즘에도 이 말이 가끔 운위(云謂)되는 것은 책임질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일탈(逸脫)이 너무 심하기 때문이다.성수대교 붕괴사건에서도 공직자나 기업인의 일탈이 있었다면 응당 책임을 져야 한다.그러나 그 책임을 추궁하는 과정은 합법적이고 이성적이어야 한다.초법적이고 감정적인 속죄양(贖罪 羊)만들기는 노블레스 오블리즈의 참 뜻을 훼손한다.철야조사라는 비인도적 대우를 받은 두 인사에게 잘못이 있었는지는 지금 아무도 단정할 수 없다.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불안했던 것은 부당한 방식의 책임 추궁이 자신들을 궁지로 몰아 넣지 않을까에 대한 두려움,바로 그것 때문이었는지 모른다.사람만이 아니라 기업도 마찬가지다.
성수대교 사건으로 기업과 기업인이 또 한번 매도(罵倒)당했다.만약 잘못이 있다면 비판받는 건 당연한 일이다.특히 이 사건과 관련하여,또 이 사건이 아니더라도 反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행위를 한 기업인은 반성해야 한다.이제 기업인은 생산 요소를 결합하여 시장에 내놓는 존재 만이 아니다.기업 경영이 안정궤도에 진입했으면 주변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사회적 책임이 뒤따르고 공동선(共同善)에 적극 기여해야 할 도의적 책임이 있다.학교.탁아소.양로원등 국가가 힘이 부치 는 분야의 복지시설 건설에 힘을 보탬으로써 더불어 잘사는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데 앞장서야 한다.
성수대교 사건으로 기업이 무차별적으로 비난받는다고 일말의 억울함을 표시하는 사람이 있다면 과거 자신들이 쌓아온 이미지를 다시 한번 되돌아 보기 바란다.기업과 기업인은 이번 성수대교 사건이 기업 이미지에 끼칠 영향을 과소평가하면 안 된다.
그러나 보다 심각한 것은 전체 기업과 기업인 모두를 싸잡아 비난함으로써 사명감에 투철한 다른 기업인의 의욕까지 꺾어놓는 일이다.자본주의.시장경제의 발전은 왕성한 기업가 정신을 바탕으로 한다.이들의 성취욕구(成就欲求)는 국부(國富) 창출의 원동력이 된다.미국의 클린턴 행정부는 출범하면서 기업가 정신으로 21세기형 정부를 다시 만들자는 목표를 세웠다.정부도 기업의 경쟁력을 본받자는 뜻일 것이다.고용을 창출하고,실생활의 기술을진보시키고,궁극적으로 국민생활을 향상 시키는 과업은 모두 기업의 몫이다.국가 경쟁력 강화의 첨병(尖兵)은 기업이다.이런 기업의 의욕을 분별없이 꺾는 일은 백해무익(百害無益)할 뿐이다.
우리는 88올림픽 직후에도 혹독한 과거청산 과정 때문에 국민의 사기가 떨어진 경험을 했다.지금은 김일성(金日成)사망이라는통일의 호기를 맞고도 일련의 강력범죄와 대형사고의 연속 속에서허우적대고 있다.언제까지 이럴 것인가.대형 참 사는 네 탓이라는,그 탓을 규명하는 일 때문에 세계로 웅비하는 도약 작업을 중지할 셈인가.자조(自嘲)와 패배의식에서 과감히 빠져나와야 한다.그리고 모두 힘을 합쳐 뛰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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