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3면

고3 진학을 앞둔 봄방학 동안 나는 혼자서 어디론가 싸돌아다녀보고 싶었다.혼자서 무작정 걷거나 탈것에 실려 흔들리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다.고3을 어떻게 맞을 것인지에 대해서도 원칙을 정하고 싶었다.그리고…그리고 써니와 하영이를 향한 내 마음에 대해서도 무언가 더 분명하게 드러날 때까지 깊이 생각해보고 싶었다.
그렇지만 어머니가 여행을 허락하지 않았다.겨울방학 동안에도 여기저기 돌아다녔으니까 봄방학 동안에는 차분하게 틀어박혀 있어야 한다고 어머니는 그러셨다.나는 제대로 항변할 수도 없었다.
겨울방학 동안에는 써니를 찾기 위해서 돌아다닌 거 니까 봄방학동안에는 나 자신을 찾으러 돌아다니고 오겠다고 말해본들 어머니가 내 말을 이해해줄 리 만무였다.
봄방학 동안의 하루,나는 하영이와 광릉의 수목원에 갔었다.황량한 활엽수,꿋꿋한 침엽수와 늙은 여인의 얼굴같은 잎을 달고 있는 상록수의 곳곳에 그것들이 견뎌낸 겨울의 흔적처럼 잔설이 남아 있었다.
『아직 겨울인데 방학 제목이 봄방학인 건 웃겨.겨울방학 투 그래야지.』 내가 하얀 입김을 토해내면서 하영이를 웃기려고 그랬다.하여간 나무들 사이를 걷는다는 건 참 기분좋은 일이었다.
하영이가 살짝 웃다가 입을 열었다.
『넌…문과반에 계속 있을 거지.』 『그럼.나같이 공부도 못하는 게 이과반에 가면 어떠하겠어.』 『아냐.1년 뒤에도 달수 니가 공부를 못할 거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어.대학들이 원하는 건 단지 고3 하고도 11월 현재의 성적이라니까.어쨌든 난… 이과반으로 가기로 했어.』 『그럼…나중에 뭐가 되는 거야?』 『우리 엄마 아빠하고도 많이 의논했는데,난 의사가 되구 싶거든.』 『어휴,그거 징그럽지 않니 계집애가.』 『달수 넌…글쓰는 사람이 될 거니?』 그런 말은 나를 무조건 울적하게 만든다는 걸 하영이는 모르는 모양이었다.나는 내 일에 대해서 말하는 건 무조건 질색이었다.
『아니.난 아무것도 안될 거라구.아냐 어쩌면…모범택시 운전사같은 거라면 재미있을지도 몰라.안그래? 또 우체부 아저씨라든지…아니면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라든지…하여간 지금은 모르는 거지 뭐.』 『그런 건 다 아저씨나 할아버지가 돼서야 할 수 있는 거잖아.』 하영이가 말해놓고 나서 약간은 슬프게 웃었다.
『넌…의사가 돈을 잘 버니까 의사가 되려는 거야?』 『그런 건 아니야…어쨌든 달수 니가 아프면 내가 낫게 해줄 수 있을거잖아.그게 어디야.』 하영이가 말해놓고 나서 약간은 쑥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나는 말하기 전에 침을 한번 삼키고 나서 과감하게 말해버렸다. 『난 말이야,내가 아플 때 하영이 니가 치료해주는 것 보다는 말이야,내가 병에 걸리지 않게 미리미리 내 옆에서 잘 챙겨주는 게 더 좋겠는데.』 하영이가 걸음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하영이는 텅 빈 표정이었다.내가 하영이 쪽으로 다가서니까 하영이가 뒤로 물러섰지만 거기는 나무가 버티고 있었다.그래서 하영이는 더 이상 물러서지 못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