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3면

하영이는 겨울방학 동안에 가족들과 함께 용평에 스키도 타러 갔다 오고 그러면서 잘 지냈다고 했다.내게 몇번인가 집으로 전화했지만 통화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나는 써니엄마와 함께 써니를 찾으러 돌아다녔다고 솔직하게 말해주었다.겨울방 학이 끝나고맞은 첫 토요일 오후였는데,하영이와 나는 연희동의 피자집에 마주 앉아서 그런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었다.
『결국 마지막날에는 화장터에까지 갔었어.거기에서도 아무 소득이 없긴 했지만… 그래서 완전히 마음이 정리된 건 아니지만… 하여간 써니엄만 어느정도 정리됐나봐… 이젠 나하고도 만날 기회가 없을거야.』 『잘했어.정말이야… 그애 엄마를 도와준 건 잘한 일이야.…그동안에 나한테 전화도 한번 하지 않은 건 잘못한일이지만.』 하영이가 식은 커피잔을 괜히 한번 저어대면서 덤덤하게 마음에 두었던 이야기를 꺼냈다.그만큼 우리는 무언가 분명치 않은 관계이기는 했다.이런게 바가지를 긁는다는 걸까 하고 나는 생각해보았다.
『써니엄마가 한번은 그랬어.새로 사귄 여자친구가 있느냐구 말이야.그래서 난… 아니라구 안 그러구 가만히 있었어.』 하영이가 커피잔에서 손을 떼고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나는 하영이가듣기 좋으라고 한 이야긴데 하영이에게는 오히려 못마땅하게 들렸나 보았다.그래서 내가 또 말했다.
『좀 그렇긴 했지만… 어쨌든 난 거짓말하는건 싫었거든.』 『아무 말도 안한 거하구 진짜를 말한 것하고는 다르잖아.』 하영이는 더이상 말하지 않았지만,나도 거기에 대해서 더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그래서 우리는 그날 조금 모호한 심사로 서로의 마음 속을 외면하면서 어색하게 헤어졌다.
고교2학년을 마무리하는 2월의 학교생활은 그런대로 큰 사고없이 지나갔다.
건영은 재판에서 과실치사죄로 1년형을 받았는데(미성년이고 초범이라서 정상이 많이 참작된 거라고 했다)소년원으로 넘어가서 그런대로 지내고 있었다.육상선수들이 출발점에 허리를 굽히기 직전에 몸을 풀 때처럼,학교아이들은 대개 고3 맞기 를 앞두고 긴장된 속에서 풀어져 있었다.상원이와 계집애들이 심하게 싸운 것도,또 우리 악동들이 그 계집애들을 진하게 골탕먹이고 낄낄거렸던 것도,그렇게 조바심과 긴장과 초조로부터 벗어나고 싶어서 벌였던 발광이었는지도 몰랐다.
덕순이가 하필이면 우리 악동들 중에서도 상원이를 타깃으로 삼았는지 모르겠다.상원이는 우리들 중에서 가장 우직하고 말수도 적은 친구였는데 말이다.특히 덕순이는 상원이의 가장 소중한 보물을 노리갯감으로 삼아서 상원이를 제정신이 아니게 만들고야 만거였다. 점심시간 뒤인 6교시나 7교시나 그랬을 거였다.
『이 못된 년이….』 교실 뒤쪽에서였다.큰소리는 아니었지만 진짜로 화가 나서 쏘아붙이는 상원이의 소리가 들렸다.
내가 돌아봤을 때에는 덕순이가「뭐야?」라면서 들고 있던 물컵의 물을 상원이의 얼굴에 끼얹는 것이 보였다.상원이가 근처의 걸상 하나를 걷어찼는데 걸상이 넘어지면서 덕순이의 정강이를 때렸나 보았다.덕순이가 비명을 지르면서 주저앉았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