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레터] 철학 책이 신바람나는 때도 있네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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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철학책이 제철을 만난 듯합니다. 수능 직후. 바야흐로 논술 시즌이 닥친 덕이지요. 청소년 눈높이에 맞춰 철학을 말랑말랑하게 풀어낸 책들이 딱 먹혀들 때니까요. 시류에 편승한 기획 출간이 꼭 얄팍하리란 법도 없나 봅니다. 이번 주 나온 철학 신간 중 『철학, 땅으로 내려오다』(그린비)와 『처음 읽는 서양 철학사』(웅진지식하우스)는 누가, 언제 읽어도 책값 이상 건질 만한 수작들입니다.

『철학, …』의 저자는 서울대 철학과 출신으로 10년 가까이 논술강사 생활을 했다는 김민철씨입니다. 김씨는 철학을 ‘따져 묻기’라고 정의하면서, 그 ‘따져묻기’정신으로 각종 사회 이슈를 해석합니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놓고는 소크라테스의 ‘악법도 법이다’를 연결시켰습니다. ‘악법도 법이다’는 단순한 준법정신이 아니랍니다. 아테네의 법에 ‘암묵적 동의’를 했던 만큼 사형이 선고됐다고 해서 이제 와 그 법을 어길 수는 없다는 게 소크라테스의 뜻이라지요. 그러니 ‘암묵적 동의’를 하지 않기 위해 ‘불복종’을 선택한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은 누구보다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잘 따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병역거부에 대해 토론하면서 “헌법에 보장된 종교의 자유” 운운하는 것도 논리적 오류라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 헌법이 보장하는 종교의 자유란 오직 마음 속에서만 유효할 뿐 생각이 외적 행위로 표출되면 실정법의 제한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 외에도 독재와 민주주의, 기회의 균등 등 다양한 주제가 등장합니다. 베테랑 사교육 강사의 입담을 따라 책장을 넘기다 보면 ‘아, 논리적 사고가 이런 거였어’라며 생각이 트이는 경험을 할 법합니다.

『처음 읽는 …』는 현직 고교 교사인 안광복씨의 신작입니다. 그는 이미 『철학의 진리나무』『철학, 역사를 만나다』 등을 스테디셀러 리스트에 올린, 이름난 저자이지요. 『처음 읽는 …』에선 서양 철학자 38명의 인물 이야기를 통해 철학의 핵심 개념을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사상이 어떻게 탄생해 그 뿌리를 내렸는지를 철학자 한 명 한 명의 개인사와 시대 배경에 녹여 친절하게 풀어냅니다.

『철학, …』와 『처음 읽는 …』 모두 논술 대비용 문답을 억지로 엮어놓은 주입식 철학책은 아닙니다. 갈 길 바쁜 수험생들에겐 ‘한가한’ 책일 수도 있겠지요. 결국 고생하는 수험생들이 미끼가 돼 좋은 책들을 건져올린 셈이 됐나요. 논술에 올 인하게 만든 혼란스런 대입 제도에 감사라도 드려야 할는지.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이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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