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조건이 궁금하세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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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과 자유가 부딪치는 긴장의 지대에서 허망하고도 아픈 춤을 추는 이들이 바로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이다.” 신과 인간의 관계, 그 속에서 운명과 싸우는 인간의 고뇌에 대한 이야기, 그리스 비극. 그것은 인간의 본질과 실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문학의 원형이자 최고의 문학작품으로 일컬어져 왔다. 그렇기에 “문학공부를 하는 이라면 누구나 그 연구에 뛰어들고 싶어하는”지도 모른다. 이를 집대성한 서적이 나왔다. 연세대 임철규 명예교수가 펴낸 『그리스 비극』(부제 : 인간과 역사에 바치는 애도의 노래). 부제에서 저자의 핵심적 인식인 “위대한 문학은 애도의 표현이다”는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그리스 비극』은 3대 비극 작가로 꼽히는 아이스퀼로스·소포클레스·에우리피데스의 작품을 넓고 깊게 다룬 책이다. 616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 수많은 참고문헌과 주석에서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저자 스스로도 “그리스 비극에 대한 교과서적이고 개론적인 책이나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그리고 에우리피데스의 작품들을 개별적으로 다룬 빼어난 저서는 많지만, 그것을 함께 묶어 ‘그리스 비극’ 전체를 조명한 깊이 있는 책은 별로 없다”며 이런 아쉬움이 책을 내게 된 동기라고 밝혔다. 책은 아이스퀼로스의 작품 전부와 소포클레스의 작품 중 『엘렉트라』를 제외한 전부,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19편 중 주요 작품 7편을 다루고 있다.

호메로스의 영웅시대를 지배하고 있던 신화의 세계, 그 시대 주인공의 삶의 방식 및 가치관이 해체되던 시기, 그리스 비극은 싹튼다. “비극은 신화가 시민의 관점에서 고려되기 시작할 때 태어난다”는 얘기와 맥락이 닿아있다. 신화가 인간 세계로 내려왔을 때 인간의 본질은 더욱 뚜렷해진다. 완벽하지 못하고 어딘가 상처 있는, 유한한 존재로서의 인간이 바로 그것이다. 운명과 싸우려 할수록 숙명의 틀에 갇히게 되는 인간의 비극. 신 앞에 한없이 유약하고 무력하지만 자유에의 의지를 잃지 않는 인간의 비극성은 어쩌면 인간 실존의 조건인지도 모른다.

책 속의 주인공들이 겪는 고통과 슬픔은 과거완료가 아닌 현재진행형이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쉼 없이 돌고 돌기 때문이다. 문학은 그런 인간의 아픔을 어루만진다. 우리의 『장길산』이 그렇고 『태백산맥』이 그러하다.
저자는 “망각의 바다 속에서 억울하게 누워 있는 숱한 인간들을 그 바다로부터 기억의 땅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믿는다. “수많은 시대의 희생자, 삶이라는 허무의 바다에서 허망한 몸부림을 치다 사라져간 숱한 존재들을 불러내어 그들을 ‘기억’해주고, 그들이 남긴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그들의 고통과 죽음을 애도하는 것이 문학의 진정한 행위라고 본다”고 말한다.

이 책은 사실 그리스 비극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만으로 ‘문학 초보자’가 읽기에는 만만치 않다. 그러나 전쟁·살인·억압에 대해 고민해 본 사람이라면, 비극의 근원과 인간의 조건에 대해 의문을 품어 본 사람이라면 펼쳐볼 만하다.

프리미엄 최은혜기자 ehchoi@joognang.co.kr
자료제공=한길사 / 031-955-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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