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일의 INSIDE PITCH PLUS <34> ‘속 멋쟁이’ 김재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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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호 17면

김재현(SK)은 멋쟁이다. 모델라인이 뽑은 베스트드레서 경력도 있다. 흠잡을 데 없는 몸에 타고난 잘생긴 얼굴도 그렇지만 ‘관리’에서도 그렇다. 쉽게 말해 ‘추리닝’을 입을 때도 다르다. 구단에서 나눠준 똑같은 스타일을 부담스러워한다. 자신만의 스타일, 자신만의 개성을 살릴 줄 안다. 그렇다고 ‘나 혼자만’ 식으로 우쭐거리지 않는다. 어려서부터 단체운동 야구가 그의 삶이었다. 그래서 ‘팀’을 안다.

개인적으로 그가 신일중학교에서 야구를 할 때 처음 봤다. 벌써 17년이 됐다. ‘인사이드피치’가 본 그의 야구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자신감이다. 그리고 덧붙이면 자존심이다. 늘 당당하다. 결코 기죽거나 주눅 들지 않는다. 그래서 때론 오만하게 비친다. 콧대가 지나치게 높은 게 아니냐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그건 그가 살아온 길이다. 거의 이겼고 져본 적은 손으로 꼽는다. 그가 하면 됐다. 아마추어 때 그랬고, 프로에 오자마자 그랬다. 그에겐 맨 꼭대기, 맨 앞이 가장 익숙한 자리다.

그래서인지 그에겐 버릇이 있다. 주전이 아닌 날에는 더그아웃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전광판에 자신의 이름이 없을 때, 운동장 한쪽에서 대타를 준비하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다. 그건 ‘김재현 스타일’이 아니라는 의미다. 팬들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게 자신의 프라이드, 자존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스스로 판단했다는 의미다.

10월 23일 한국시리즈 2차전. 1차전에 선발로 뛰었던 김재현의 이름이 없었다. 전날 두산 에이스 리오스에게 안타를 뽑았고 그날 상대 선발이 오른손 투수 랜들이었기에 김재현의 제외는 의외였다. 김성근 감독은 박재홍을 선발 지명타자로 기용했고 경기 중 왼손 대타로도 박재상·박정권을 넣었다. 김재현에겐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 경기 8회 무렵. 눈을 의심했다. SK 더그아웃 옆, 점퍼를 입은 김재현이 스윙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차례가 아니면 더그아웃에서 나오지 않는 그였다. 팬들에게 ‘후보 김재현’의 모습을 보이는 걸 자존심의 상처로 생각했던 그였다. 그런 그가 묵묵히 기회가 주어지길 기다리며 방망이를 돌리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처음 보았기에 또렷이 기억에 남았다.

SK는 그날 경기도 졌다. 홈에서 2패였다. 김재현은 이튿날 쉬는 날이었지만 운동장에 나가 스윙을 했다. 누가 나오라고 한 것도 아니고 같이 하자고 한 것도 아니었다. 김성근 감독이 그 모습을 보았다. 김재현은 3차전부터 다시 선발로 나갔다. 김성근 감독은 “그런 모습을 보고 지더라도 (김재현을) 안고 가야겠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3차전부터 김재현은 결정적일 때 꼭 필요한 한 방을 때렸다. 결승타-쐐기홈런-결승타-쐐기홈런을 약속이나 한 것처럼 토해냈다. 그는 팀의 4연승을 이끌었고 MVP가 됐다.

그래서 결과는 또 한번 김재현답게 됐다. 그는 역시 멋쟁이였다. 리더였고 찬스에 강했다. 그러나 과정은 달랐다. 이번에 김재현은 자신을 버렸다. 원래의 모습이 아니었다.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고 남에게 보여주려는 ‘겉 멋쟁이’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충실한 ‘속 멋쟁이’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그는 한 수 위의 진정한 멋쟁이가 됐다. 김성근 감독은 “그는 잃어버린 자아를 찾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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