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폭풍 컸던 '신데렐라 드라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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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검찰이 30일 변양균(58) 전 청와대 정책실장과 신정아(35)씨를 구속기소함으로써 100일간에 걸친 수사가 일단락됐다.

이번 수사는 자신의 신분 상승 욕망을 위해 학력을 위조한 단순 사건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새로운 사실들이 속속 밝혀지면서 온 국민의 관심을 모으는 권력형 비리 사건으로 발전했다. 수사 과정에서 정권 실세가 연인을 비호하기 위해 멋대로 특별교부세를 배정하고 특별사면에 관여한 의혹이 튀어나왔다. 압수수색에서 기업인의 비자금 조성 혐의가 새로 포착되기도 했다. 이 사건은 학계.예술계는 물론 종교계.연예계.관계.재계에까지 불똥이 튀었다. 우리 사회 곳곳의 치부가 드러난 것이다. 신씨 학력 위조 사건의 후폭풍으로 동숭아트센터 대표 김옥랑씨, 연극배우 윤석화씨, 영화배우 장미희씨, 능인선원 지광 스님 등 유명인들의 허위 학력 고발.고백 퍼레이드가 이어졌다.

하지만 7월 23일 동국대 측이 신씨를 서울서부지검에 고발할 때만 해도 검찰 수사는 미적지근했다. 신씨가 해외로 도피했다는 이유로 압수수색 같은 기본적인 증거수집 절차도 이뤄지지 않았다. 수사도 신씨의 학력 위조 사실을 확인하는 것으로 끝날 것 같았다. 변 전 실장이 동국대 이사였던 장윤 스님에게 "신씨의 학력을 문제 삼지 말라"고 압력을 넣었다는 의혹이 제기됐지만 그냥 넘어가는 듯했다. 변 전 실장은 강력히 부인하며 청와대 정책실장 직을 유지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깜도 안 되는 의혹"이라며 변 전 실장을 두둔하기도 했다.

수사에 착수한 지 한 달이 지났을 때쯤 사건은 전혀 다른 차원으로 비화됐다. 변 전 실장과 신씨가 주고받은 e-메일에서 두 사람의 부적절한 관계가 포착된 것이다.

정권 실세가 '주연'으로 등장하면서 이 사건은 한 편의 '드라마'가 됐다. 권력과 돈, 남녀 간의 스캔들이 얽혀 대중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요소를 두루 갖춘 사건이 된 것이다.

수사 결과 변 전 실장은 신씨를 위해 직.간접적 지원을 아끼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신씨의 동국대 교수 임용을 돕기 위해 특별교부세를 마음대로 배정했다. 신씨가 기업을 대상으로 발군의 모금 실력을 과시하는 데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이 과정에서 변 전 실장의 고교 동창들이 최고경영자로 있는 기업들이 거액을 후원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뿌리 깊은 학연의 폐해를 다시금 상기시켰다.

신씨는 변 전 실장을 통해 김석원 전 쌍용그룹 회장의 특별사면에까지 관여한 혐의가 포착됐다. 30대 여성이 정권 실세를 등에 업고 대통령의 고유 권한인 특별사면권까지 입김을 미친 것이다.

수사 과정에서 불거진 김 전 회장의 비자금도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다. 투입한 공적 자금을 완전히 갚지 못한 부실 기업의 전 사주가 아직도 수백억원대 규모의 검은돈을 주무르고 있다는 것에 대해 국민은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기업은 망해도 사주는 망하지 않는다'는 속설을 입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모의 30대 큐레이터와 50대 정권 실세의 부적절한 관계에 대해 국민의 관심은 '관음증' 논란을 일으킬 정도로 뜨거웠다. 그러나 이번 사건의 초점은 두 사람의 불륜 드라마가 아니다. 오히려 허술한 학력 검증 시스템, 정권 실세의 권력 남용, 부실 기업주의 불법 비자금 조성 등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점을 드러낸 시사고발 다큐멘터리에 가깝다. 100일간의 드라마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보강 수사를 통해 ▶변 전 실장이 김 전 회장의 특별사면에 어떻게 관여했는지 ▶신씨를 동국대 교수로 임용하면서 동국대에 특혜성 정부 지원금을 몰아줬는지 ▶김 전 회장의 비자금 조성 경위와 사용처 등 남은 의혹에 대한 철저한 규명이 이뤄져야 한다.

권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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