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바루기] 입도선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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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입도선매(立稻先賣)’는 ‘서 있는 벼를 미리 판다’는 말로, 본래 자금이 없거나 빚에 쪼들린 농민이 현금을 구하기 위해 논에서 자라고 있는 벼를 파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뜻만으로는 문맥에 맞지 않는 경우가 있다.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HBS)은 새 입학제 도입을 발표했다. 대학 2학년 가운데 우수 인력을 미리 뽑겠다는 취지로 마련한 제도다. 인문·사회·자연과학 전공자들 가운데 로스쿨 등 다른 대학원으로 빠질 학생들을 입도선매하는 식이다”는 글을 보자.

마지막 문장에서 입도선매하는 주체는 HBS다. 그렇다면 사전상의 ‘서 있는 벼를 미리 판다’는 뜻은 문맥상 어울리지 않는다. 대학이 학생들을 미리 파는(내보내는) 게 아니라 HBS가 미리 뽑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피하려면 ‘입도선매’ 중의 ‘매’를 ‘팔 매(賣)’가 아닌 ‘살 매(買)’로 바꾸면 된다. 그러면 ‘서 있는 벼를 미리 산다’는 의미가 되므로 문맥과 맞아떨어진다. 문제는 ‘입도선매(立稻先買)’가 사전에 올라 있지 않다는 점인데, 사전에 없다고 해서 쓸 수 없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입도선매(先賣)’와 ‘입도선매(先買)’를 문맥에 맞게 사용하면 될 것이다.

표준국어대사전의 ‘입도매매(賣買)=입도선매’는 무리한 해석이라고 본다. ‘매매’는 ‘사고파는’ 행위를 함께 이르는 말이며, ‘선매’와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입도선매(先買)’ 대신 다른 말을 써도 좋다. 그러나 ‘입도선매(先買)’를 사용할 수 있다면 단어 하나를 또 얻는 것 아니겠는가.

최성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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