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분석>한국형 경수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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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국내 연구진이 한국형 경수로를 개발하기까지 겪은 어려움은 적지 않은 것이었다.朴正熙대통령 사망후 국내 원자력계는 정치권을비롯,같은 과학기술계내에서 조차도 찬밥신세를 면치 못했다.무엇보다도 미국이 우리가 원자력기술을 갖는 것을 원 치 않았고 5共정부도 이런 미국의 비위를 거슬려가면서까지 원자력쪽에 비중을둘 생각은 없었다.
따라서 이때까지 국내 원전의 추가건설은 사실상 턴키방식외에는기대할 수 없는 게 현실이었다.그러나 80년대 중반 세계 원자력계에 공급초과 바람이 불어닥치면서 기술자립의 싹이 움틀 수 있는 분위기가 마련됐다.
당시 한국원자력연구소 소장이었던 韓弼淳박사는『미국의 웨스팅하우스.컴버스천 엔지니어링(CE)등 여러 원전사업자를 놓고 기술이전을 많이 해주는 쪽을 고를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고 말했다.이런 가운데 기술이전의 타깃으로 선택된 것이 CE의영광 3.4호기였고 우리측은 설계는 공동으로 하지만 책임은 CE에 지울만큼 유리한 계약을 맺을 수 있었다.
이 계약에 따라 우리측은 86년 겨울 한국원자력연구소를 중심으로 48명의 선발대를 미국 코네티컷 윈저의 CE본부에 파견했다. 이때 선발대로 뽑혔던 30대 후반의 李炳령박사(現 原硏 원전사업본부장),鄭然浩박사(현 원연 연구기획실장)와 현 영광 3.4호기의 책임자인 韓基仁박사,울진 3.4호기를 맡고 있는 金東洙박사 등은 한국형 경수로 개발의 주역으로 꼽힌다 .이들은초기 CE가 기술이전을 노골적으로 꺼리는 가운데『기술을 익혀가지 않으면 한국에 돌아가지 않겠다』는 각오로 상대 책임자와 담판을 벌여 핵심설계에 참여하고 떼(?)를 써가며 기술을 받아낸것으로 알려져 있다.한국형 경수로는 이 렇게 해서 탄생했던 것이다. 〈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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