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에디터칼럼

불편한 진실, 위험한 진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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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하경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때로는 진실을 말하기가 주저된다. 특히 남들이 듣기 불편해하는 내용일수록 그렇다. 그래서 무모했던 시절의 추억이 떠오르곤 한다. 취재 에피소드 한 토막-.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사건기자 시절인 10여 년 전, 특정 집단의 범죄행위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당신이 누군지 잘 아는데, 이 일에서 손떼.” 단도직입적이었고, 위협적인 통첩이었다. “그럴 생각이 없는데”라고 대꾸하자 이번에는 한 술 더 떠 “죽여버리겠다”고 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가족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오기가 나서 맞섰다. “그렇지 않아도 힘들어 죽겠는데 차라리 죽여 줬으면 좋겠다”라고 받았다.

며칠 뒤 그를 대면하게 됐다. 조직을 총동원해 신문사를 흔들어 놓겠다고 겁을 주다가, 기사를 쓰지 않으면 돈을 주겠다고 회유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움직일 수 없는 물증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기사가 나갔다. 편집국에서 기사를 작성하는데, 여러 선후배가 안위(?)를 걱정해 줬다.

다행히 보복은 없었다. 나를 협박했던 인물을 포함해 여러 사람이 줄줄이 구속기소돼 유죄선고를 받았고, 사건의 진상은 만천하에 드러나게 됐다. 취재기자로서는 해피엔딩이었지만 가족들에게는 차마 알릴 용기가 없어 지금까지도 비밀로 해 둔 취재 뒷얘기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씁쓸한 느낌이 들었다. 나와 비슷한 수준으로 사건의 실체에 접근하고 있었던 한 국회의원이 기사가 나가고 난 직후에야 같은 내용으로 폭로 기자회견을 했던 것이다. 최초의 폭로가 가져올 위험을 회피하기 위한 합리적 행위였다. 이쯤 되면 진실은 불편한 게 아니라 위험한 것이 아닐까.

미국 앨 고어의 강연 모습을 재구성한 다큐멘터리 영화 ‘불편한 진실(An Inconvenient Truth)’은 전 세계를 불편하게 했다. 몇 달도 안 가 잊히고 말았던 나의 폭로 기사와는 비교할 수 없는 무게를 갖는다. 알려진 대로 인류가 쏟아 내는 온실가스가 전 세계의 대기와 대륙, 해양의 온도를 상승시키고 있어 이번 세기가 지나기 전에 지구가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맞게 된다는 것이 영화의 핵심 메시지다. 환경문제에 신경 쓰고 생활 방식을 바꿔 온실가스 배출을 최소화할 것을 촉구하고 있기도 하다. 고어는 이 영화로 오스카상에 이어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고어의 온난화 위험성 경고는 미국 정부가 추구하는 이익과 충돌한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위험한’ 폭로였다. 미국이 어떤 나라인가. 지구 온실가스의 36% 이상을 배출하고 있는 에너지 과다 소비국이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당선 직후인 2001년 3월 교토의정서의 탈퇴를 선언했다. 온실가스 배출량의 규제를 받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고어가 목소리를 높일수록 미국은 다른 나라들로부터 공격을 받게 된다.

유력 정치인이 자국이 불편해 하는 얘기를 하고 돌아다닌다면 정치적으로 불리하게 된다는 것은 상식이다. 고어는 하원의원이던 1980년 주목받지 못하는 이슈였던 지구온난화에 대한 의회청문회를 주도했고, 클린턴 정부의 부통령으로 있으면서 교토의정서 채택을 추진했다. 전 세계를 돌면서 1000번 이상의 강연을 통해 문제의 심각성을 알렸다. 표면상 국익에 반하는 행동임에도 미국 사회에서 광범위한 공감을 일으키고 있다. 제너럴 일렉트릭(GE)을 비롯한 미국 10개 대기업 최고경영자들은 올해 초 온실가스 감축을 위해 총량거래제를 도입할 것을 부시 대통령에게 촉구했다. 미국이 다원적 가치를 존중하는 토대 위에서 인류사적 과제를 수용할 태세가 돼 있다는 증거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정치적 위험을 무릅쓴 고어의 용기 못지않게 미국 사회의 성숙성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

이제 한국의 대선이 두 달 앞으로 다가왔다. 다양한 이슈가 제기되고 사회적 논의가 활발하게 이뤄질 것이다. 이번에는 국가의 미래를 결정할 근본적 의제가 설정되고, 토론과 합의가 있어야 한다. 후보들은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달콤한 얘기보다는 반드시 들어야만 하는 얘기를 들려주었으면 한다. 후보는 불편한 진실과 위험한 진실을 얘기하고, 국민은 끈기 있게 들어주는 수준 높은 선거무대를 기대한다.

이하경 문화스포츠부문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