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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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제1부 불타는 바다 땅끝에 선 사람들(53)『조선놈은 머리가나쁘다더니 어제 한 말도 잊어 먹는 모양이군 그래.내가 가르쳐줄까.조선인들이 들고 일어나기로 했다면서?』 이게 무슨 소린가.걸려도 크게 걸렸구나.제가 제 살을 뜯는다지만,어떤 놈이 또나를 걸고 넘어지는가.조선놈끼리… 어금니를 물면서 길남이 벽에등을 대듯이 기대 서 있는 조씨를 돌아보았다.
잡아당겼던 머리를 앞으로 쳐박듯 내리누르며 가와무라가 말했다. 『대답해라.』 『그,그런 말,없었습니다.』 『없었다?』 바닥을 쿵쿵 울리게 몇 걸음 떼어놓으면서 가와무라가 소리쳤다.
『어이,가네야마.』 문가에 서 있던 가네야마가,꼬리를 서리면서 기는 강아지처럼 두 손을 앞으로 하고 가와무라의 옆에 와 섰다.어제의 그 경비원이었다.
『그런 일 없었다는데?』 가네야마가 웃는 얼굴로 책상 위의 종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 새끼들.』 때만났다는 듯 가네야마가 앞으로 나서면서 조씨를 보며 소리쳤다.
『너 이리 와.거기 의자 가지고 와서 앉아 봐.』 길남이 옆에 와 앉는 조씨를 바라보면서 가네야마가 길남의 옆으로 다가섰다. 『여기 기무라는 그랬다는데,너는 모른다면 그건 말이 안 되잖아?』 길남이 조씨를 돌아보았다.뭐 이런 물귀신같은 놈이 다 있어.그런 말은 제 입으로 해 놓고 나서,왜 날 끌고 들어가는 거지.길남이 벌컥 소리를 질렀다.
『조씨는,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내가 뭐 잘못한 게 있는 거여?』 이런 놈.시골에서는 그랬다.내 어려서 살던 시골에서는 그랬다.소 덕석같은 놈이라고.소 덕석이 뭐던가.겨우내 춥지 말라고 소 등에 얹어서 덮어주는 거였다.똥싸서 뭉개고 먹다남은 여물에 뒹굴며 자고,그래서 한 겨울 나고 나면 가죽처 럼뻣뻣해지던 그 소 덕석이라는 거.정신을 가다듬으려고 벽을 쏘아보면서도,뭔가 잘못 걸렸구나 하는 느낌을 길남은 숨길 수 없었다.그렇지만 내가 한 말이 없지 않나.길남이 묵묵히 조씨와 눈을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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