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케현장>태백산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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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해방직후 격동의 시대상을 인간 군상들의 갈등과 처절한 운명을통해 그린 임권택 감독의 새 영화『태백산맥』을 촬영중인 전남장성군북일면의 금곡마을.
공비 근거지를 없애기 위해 주민들을 소개시키고 마을을 불태우는 장면을 위한 막바지 촬영작업으로 첩첩산골 조그마한 동네가 4일에는 무척이나 북적댔다.
갑자기 매미들이 한꺼번에 울음소리를 냈다.카메라에서 황급히 눈을 뗀 정일성 촬영감독의 고함소리가 터졌다.『이거 도대체 몇번째야.』한여름에 봄장면을 동시녹음으로 찍다보니 생기는 일.
잠시 여유가 생겼다.구경꾼 50여명이 일시에 배우들에게 사인을 부탁하는 바람에 현장은 갑자기 북새통을 이뤘다.휴가를 내 서울에서 구경왔다는 한 가족은 안성기와 기념촬영을 하고 엑스트라로 나온 두꺼운 전투복 차림의 장성고교 2학년1 반 학생들은오정해.신현준등에게 달려가기 바쁘다.
노을이 지자 촬영진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세트 초가에 석유붓고 와.』『가스불꽃 작동 시험한다.1번 켜,2번 켜,3번 켜.』특수효과 담당 박광남 기사의 목소리가 날카롭다.
총 5천만원이 들었다는 세트중 초가 5채에 20ℓ짜리 경유 10통이 뿌려지고 24통의 LPG용기와 연결된 불꽃만드는 기기가 차례차례 불을 토했다.
오후7시,임권택 감독의 깐깐한 지시가 무선을 타고 연신 흘렀다.『박승배기사,피난민들이 내가 서 있는 여기까지 내려오면 그때부터 A카메라를 돌려.』『아니,누가 벌써 가스불꽃 올렸어.빨리 꺼.』 7시12분,흘러내리던 땀을 연신 훔치던 임감독의 입에서 드디어『레디 고』사인이 떨어졌다.일순 주변이 적막에 잠겼다.세트 초가에서 불이 솟았다.
『저런,왜 뒷집은 안 타는거야.』임감독이 입이 바짝 타는 목소리로 무전기에다 대고 연신 고함을 지른다.무전기에서는 연출부와 특수효과조 사이의 다급한 교신이 혼란스럽게 들려왔다.『연막탄 빨리 터뜨려.』 이윽고 카메라 뷰파인더에 뒷집이 타오르는 장면이 잡혔다.『됐어,이제 끝내자.컷.』임감독의 얼굴에 미소가피어올랐다.레디고 사인이 떨어진후 30초만의 일이었다.
『맞아,그땐 정말 이러고 피난 갔었어.』엑스트라로 나온 한 할머니가 심각한 표정으로 한마디 하면서 쪽머리 가발을 벗었다.
뙤약볕속에서 하루종일 촬영된 필름은 9월 개봉에서 있을 영화팬들의 평가만 남긴채 케이스 속으로 들어갔다.
[長城=蔡仁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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