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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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제1부 불타는 바다 땅끝에 선 사람들(48)『아 처음에는 돈많이 준다고 가라고 가라고 하더니만 웬걸.좀 지나니까 순사 데리고 와서 반강제로 엄포를 놓는데…웬걸.그 통에 동네에 있던 발빠른 사람들은 간도다 뭐다 다들 야밤에 짐 싸서 날아버리는데어쩌 겠나.지목받았던 사람 중에는 나만 남았는데 무슨 재주로 그걸 피하겠어.군대 나가서 죽느니 보다는 그래도 이쪽이 좀 수월하겠다 싶어,끌려나왔지.』 『그러셨군요.』 그때였다.
『거기 뭔가?』 갑자기 방파제 쪽에서 거칠게 일본말이 들려왔다.조씨가 앉은 키에 더 구부릴 것도 없는 몸을 계단에 구부리며 중얼거렸다.
『젠장헐….뭐여 또.』 저벅거리는 발자국 소리와 함께,숙사 입구의 불빛속으로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불빛을 등지며 까아맣게 드러나는 그의 모습을 길남은 눈을 가늘게 뜨면서 지켜보았다.총을 어깨에 멘 그는 각반을 차고 있었다.경비원의 옷차림이었다. 『누구야? 거기 있는 거 누구야?』 납작 엎드려 있던 조씨가 갑자기 개구리가 튀듯이 일어섰다.그는 계단을 성큼 내려서며 부동자세를 했고,큰 소리로 대답했다.
『하이 와다쿠시데스.』 『누군가 말이다.이름을 대라!』 『기무라입니다.조선 징용공 기무라입니다.하아,야마시타상 아니십니까? 고생많으십니다.저희들 때문에 밤늦게 잠도 못 주무시고.』 마치 무슨 일본말 연습하듯이 떠들고 있는 사이,저벅저벅 다가온경비원이 조씨 앞에 와 섰다.』 『아,넌가? 무슨 일이야,이 밤중에.』 『네.변소에 다녀오는 도중입니다.』 어깨에 멘 총을한번 추스르고 나서 그는 들고 있던 대막대기로,사정없이 조씨의배를 쿡 찔렀다.갑작스런 일격에 조씨가 억 소리를 내며 몸을 꺾었다. 『너 지금 나에게 장난하나!』 배를 움켜잡은 채 몸을구부린 조씨가 말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변소가 아니잖아.』 『정말입니다.믿어 주십시오.』 『이놈 봐라,거짓말을 하는 거 보니까 뭔가 수상한 놈 아닌가.』 이번에는 야마시타가 조씨의 어깻쭉지를 내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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