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홍구칼럼

지금 대한민국의 건강상태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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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한국정치 병폐의 큰 원인은 지도자와 정치인을 탓하기보다 잘못된 제도에서 찾아야 한다. 우리의 역대 대통령이나 오늘의 대통령 지망생들의 자질이 수준 미달이어서 한국정치의 발목이 잡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대체로 유능하고 나라 사랑에 앞장서는 인물들이다. 다른 민주국가의 정치인들보다 자격이 크게 모자란다고 평가할 이유도 없다. 그렇다면 한국정치의 한계는 인물보다 제도에서 비롯된다는, 즉 지금의 제도로는 누가 나서도 획기적인 정치력의 반전을 기약하기 어렵다는 간단한 사실을 정치권과 국민이 바르게 인식해야 될 때다. 적절한 제도개혁 없이는 대선 결과에 관계없이 한국정치의 혼돈은 지속될 수밖에 없다는 전망이다.

민주정치는 다수에 의한 통치와 소수의 권리 보장을 대원칙으로 하고 있다. 한국정치는 민주화에 성공한 이후 소수의 권리 보장이란 차원에서는 상당한 발전을 이뤘다고 자부할 수 있지만 다수에 의한 통치 면에선 심각한 한계를 노출하고 있다. 청와대로 권력이 집중되는 정치문화 속에서 연이어 ‘소수 대통령’이 집권하는 일이 지속돼 왔다. 36.7%의 득표로 당선된 노태우, 정치이념과 지지세력을 달리하는 지도자의 편의적 합당이나 연합으로 집권한 김영삼(3당 합당), 김대중(DJP 연합), 노무현(노·정몽준) 대통령이 과연 다수에 의한 통치원칙을 실현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다. 더욱이 현행 제도에서는 정치의 중심에 서 있는 대통령에게 아무리 큰 실책이 있다 하더라도, 또는 아무리 국민의 지지율이 형편없이 떨어진다 해도 스스로 사임이라는 극단적 방법 외엔 어떤 방법으로도 책임질 수 없는 것이 그 한계다. 이렇듯 책임정치보다 ‘무책임정치’가 일상화된 것은 대통령의 인물이나 자질이 아니라 정치제도가 만들어낸 결과인 것이다.

계절이 바뀌면 기온에 맞춰 옷을 갈아입어야 하듯 정치제도도 상황과 건강 상태의 변화에 따라 적절한 수정과 조정이 필요한 법이다. 오늘의 한국정치가 처한 위기가 바로 그러한 조정을 필요로 하고 있다. 특히 내년은 대한민국 건국 및 헌법 제정 60주년을 맞는 해로 헌법 개정을 포함한 제도 개선을 논의하기에 적절한 시점이라 하겠다. 다만 한국정치사에서 개헌 논의는 대단히 민감한 사안이었기에 대통령의 임기 말이나 선거를 앞두고 개헌 논의를 시작하는 것은 적절치 않으며 이미 국민적 합의도 조성돼 있는 상태다. 따라서 누가, 언제, 어떻게 개헌 논의를 제의하겠는가는 신중한 판단이 요구되는 일이다. 그렇다면 내년부터 국정을 이끌겠다는 대통령 후보나 정당들은 지금의 시점에서 어떤 입장을 취해야 될까.

일찍부터 국민에게 헌법 개정의 내용에 대한 구체적 입장이나 공약까지 제시할 필요는 없다. 먼저 헌법 개정에 임하는 절차나 일정에 대한 입장을 확고히,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 후보와 정당의 책임 있는 자세라 하겠다. 예컨대 내각제와 같은 권력 구조의 문제나 통일에 대비한 조정과 같은 민감하고 복잡한 사안을 제기하여 대선 정국의 혼란을 가중시키는 것은 피하는 것이 마땅하다. 오히려 대선 후 내년 총선 전에 각 정당은 개헌에 대한 구체적인 제안을 내놓고, 18대 국회 시작부터 개헌특위를 구성해 정치제도 조정을 매듭짓겠다는 입장을 대선 후보들과 여야가 한가지로 국민에게 약속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리하면 바로 이번 대선이 책임정치를 구현하려는 획기적 제도 개선의 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홍구 전 총리·본사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