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뇌 속을 손금 보듯 … 55. 10만 달러짜리 전자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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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KAIST에서 받은 연구 정착금 10만 달러로 산 MRI 연구용 전자석

 내가 미국 뉴욕 스토니부룩대 로터버 교수를 만나고 컬럼비아대 포스닥이었던 머슬리 박사로부터 MRI(당시는 NMR-CT로 부름)의 기본을 배운 직후인 1979년 하반기였다. X선 CT와 PET를 개발해본 내가 봤을 때 MRI도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침 KAIST 내 연구실에는 여섯 명의 대학원생(컬럼비아대에는 포스닥 한 명과 연구원 세 명)이 있어 아쉬운 대로 연구 인력은 있었다. MRI 연구의 베이스 캠프를 KAIST에 두기로 했다. 우수한 대학원생과 신입 교수 정착금으로 받은 연구용 종잣돈 10만 달러(당시 환율로 약 1억원)가 있었다.

 MRI의 가장 중요한 부품은 전자석이었다. 전자석은 전류를 흘리면 자석의 성질을 띠는 것이다. 10만 달러를 주고 미국에서 거대한 전자석을 사왔다. 한국에서 이런 대규모 연구를 한 대학은 거의 없었다. 지름 1.5m 정도의 거대한 전자석이 연구실에 들어오자 KAIST 교수들이 너나 없이 구경하러 왔다. 기껏해야 1만~2만 달러짜리 장비를 사던 교수들이 그걸 보고 기가 죽는 표정이었다.

 전자석은 크고 무거워 조립식 크레인으로 움직여야 했다. 겉에 빨간색 페인트를 칠한 전자석은 보기만 해도 뭔가 있는 듯했다.

 연구 지원금 10만 달러를 톡톡 털어 전자석을 샀기 때문에 나머지 부품이나 측정기들은 다른 방법으로 조달해야 했다. 다행히 같은 학과 교수들이 풍부한 연구비를 받은 덕에 많은 부품과 측정기를 갖고 있었다. 이방 저방을 다니며 부품을 얻어오고 측정기도 빌려왔다. 다른 교수들도 나를 돕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트랜지스터나 전선·기판·오실로스코프 등 웬만한 것은 학과 교수들의 방에서 구해올 수 있었다.

 내가 스웨덴 웁살라대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면서 실험할 때도 다른 연구실에서 온갖 장비를 빌려 사용해본 적이 있다. 그때 지도교수 투베는 다른 대학원생들에게 나를 본받으라고 가르치기도 했다.

 어떻든 그렇게 해서 10만 달러짜리 1k가우스 전자석과 핵심 부품을 제외하고는 모든 부품을 얻어와 조립한 뒤 MRI 연구에 시동을 걸었다. 1k가우스는 자석의 세기를 나타낸다. 위치에 따라 0.2~0.5가우스인 지구의 자기 세기보다 5000배 정도 강한 자기장이다.

 나는 전자석을 구매하기 앞서 대학원생 제자와 함께 MRI도 X선 CT처럼 3차원 영상이 가능하다는 연구 논문을 발표했다. MRI나 PET·CT 모두 수학적으로 비슷한 해법을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을 밝혀낸 것이다. 나는 이 논문을 발표하면서 MRI 개발에 자신감을 얻었다. 내가 이미 해본 CT와 비슷한 수학적 해법을 적용할 수 있다는 걸 안 이상 MRI 개발 프로젝트의 절반은 성공했다고 본 것이다.

 10만 달러짜리 전자석을 서둘러 사고 연구에 박차를 가한 것도 이런 자신감이 작용했다. MRI는 자석의 성질과 약한 전파를 이용하기 때문에 기존 X선이나 PET처럼 인체에 해를 입히지 않고 영상을 촬영할 수 있는 게 이점이었다.

조장희 <가천의대 뇌과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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