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불길속서 주민 구한 老경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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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정년을 3년 앞둬 후배 동료들로부터「영감」으로 불리는 경찰생활 27년째의 尹光洙경장(57.서울마포경찰서 동교동파출소)은 12일 오전1시 여느때처럼 심야순찰에 나섰다.
마지막 코스인 서교동 348번지일대 판자촌을 돌던 尹경장은 주민 金도영씨(28) 집에서 솟아오르는 검은 연기를 발견했다.
이때가 오전 2시35분쯤.
야밤에 판자촌에서 불이나면 엄청난 희생자가 생긴다는걸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던 尹경장은 순간 피로가 확 달아나는걸 느꼈다.곧바로 무전기로 본서에 연락,소방차 출동을 요청하고 골목길을이리저리 뛰어다니며『불이야』를 소리쳐 잠자던 주 민들을 깨웠다. 잠옷바람으로 뛰어나온 주민들을 보며 숨을 돌린것도 잠시,천장에서 불길이 계속 번져가는 金씨 집을 보는 순간 평소 순찰을돌며 얼굴을 익힌 李고속씨(70.여)와 韓종문씨(82)등 노인들 얼굴이 번개처럼 스쳐갔다.
다급해진 尹경장은 온 힘을 다해 발길로 문짝을 걷어차고 천장이 불길에 휩싸인 방안으로 뛰어들어갔다.
한 노인은 등에 업고 나머지는 손목을 이끌며 尹경장이 노인 3명을 구해 金씨 집을 빠져나온 직후 판자집 지붕은 불기운을 못이기고『우지끈』소리와 함께 그대로 주저 앉았다.
불은 인근 판자집 네채를 삽시간에 태우고 출동한 소방차 12대에 의해 간신히 꺼졌지만 尹경장의 노력에 보답하듯 희생자는 단 한명도 없었다.
尹경장이 사력을 대해 구한 노인들은 자식도 없이 월세 5만원짜리 사글세방에 살고 있는 생활보호대상자들.
『아이고 尹경장님이 아니었으면 할아버지들 큰일 날뻔 했네.』주민들의 웅성거림과 칭찬을 들으며 그때서야 尹경장은「옛날같지 않은」몸의 여기저기 욱신거리는 고통과 함께 뿌듯한 기쁨을 맛보았다. 〈兪翔淵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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