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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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제1부 불타는 바다 더 먼 곳을 향하여(46) 그렇지만 이런생각마저도 이제 버려야 한다고,길남은 좀전부터 곱씹고 있던 말을 스스로에게 되뇌어 본다.
다 꿈이었다고 하자.도망은 무슨 도망.다 없던 일이다.하늘이막는 거겠지.여기 그냥 엎드려 있으라는 소리 아니겠어.명국이 아저씨가 저꼴이 났다는 게,어디 예삿일인가.
목숨을 건졌다고는 하지만 그뿐,길남은 아직 명국을 만나 보지못하고 있었다.미음을 조금씩 떠넣어 주어서 그걸 받아 먹기는 했다고 들었지만,면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 의식이 제대로돌아왔는지,상태가 어떤지도 알 수가 없었다.
더욱 기가 막힌 건,다리를 잘라야 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었다.다리를 자른다면 절름발이가 된다는 거 아닌가.놀라서 후들후들떨리는 가슴으로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기다리고 찾아다녀서 겨우 병원의 다나카 의사를 만나 물었을 때,그는 안경 깊숙이에서 차갑게 눈알을 굴리면서 말했었다.
『그건 너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야.』 길남은 천천히 고개를숙였다.목발을 짚고 절름거리며 걷는 명국의 모습이 일렁거리며 잠깐 떠올랐다간 사라져갔다.서럭서럭.가슴에 왕소금같은 것이 뿌려지는 듯했다.
『징용 나온 조선 사람?』 여자의 목소리에 길남이 고개를 돌렸다.저녁 바람에 머리칼을 날리면서 낯모를 여자가 서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자의 조선말에 놀라며 길남이 물었다.
『누구신데요?』 여자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맞네,조선사람.』 서너 걸음 다가서면서 여자가 말했다.
『여기 나와 앉아 있을 사람이 조선사람 밖에 더 있겠나 싶었지요.그런데 참 이상하지요.앉아 있는 거만 보아도,조선사람인지일본사람인지 한눈에 알아 볼 수가 있으니.핏줄은 서로 못 속인다는게 이런 걸 두고 하는 소리인지.』 『조선에서 어떻게,여자분이 여기까지.』 『떠돌이 신세,흘러가다 보면 와 닿는데가 섬아니던가요.』 이제 해는 스러져가고 없었다.수평선 쪽이 뿌옇게흐려지면서 그 뒤쪽으로 붉은 빛이 엷게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길남은 여자의 얼굴을 또 올려다보았다.
『조선사람이 또 다쳤다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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