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달러', 기축통화 흔들

중앙선데이

입력

미국 달러화가 계속되는 약세로 기축통화 역할을 상실할 위기에 직면했다.

달러화는 지난 1944년 브레튼 우즈 체제가 도입된 이후 전세계 기축통화 역할을 해왔다. 브레튼우즈 체제는 미국 달러화를 기축통화로 하는 '금환본위제도'였다. 미국의 달러화만이 금과의 일정교환비율을 유지하고 각국의 통화는 달러와 기준환율을 설정했다.

이후 국제통화제도는 스미소니언, 킹스턴 체제(변동환율제도)를 거치며 많은 변화를 겪었다. 그러나 달러는 여전히 전세계 기축통화 역할을 지속할 수 있었다. 미국의 '강달러' 정책이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 유지를 도왔기 때문이다.

달러가 기축통화 역할을 지속 하면서 대부분의 국가들은 외환보유액을 달러로 보유하고, 달러 자산에 투자했다. 이를 통해 자국 통화 가치의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변동환율제도가 시작됐지만, 여전히 일부 국가들은 달러에 자국 화폐 환율을 고정하면서(달러 페그) 경제를 안정적으로 운용하는 밑그림을 그렸다.

달러가 기축통화로 자리잡음에 따라 미국은 막대한 무역수지 적자를 감내할 수 있었다. 전세계 경제도 미국의 구매력에 힘입어 순풍의 돛을 단 듯 성장세를 지속할 수 있었다.

◇ 美정부 '강달러 정책' 포기

그러나 3년전부터 갑자기 상황은 180도 틀려졌다. 미국 정부가 더 이상 눈덩이처럼 불어난 경상수지적자와 재정적자를 감당하기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강달러 포기라는 초강수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다.

수입 급증에 따른 미국 국내 산업의 급격한 위축도 더 이상 강달러를 유지하기 힘들게 만들었다. 결국 부시 행정부는 무역수지 적자폭 축소를 위해 달러가치 하락이란 모험을 단행했다.

미국 정부의 강달러 정책 포기로 달러화 가치는 2005년 이후 주요 통화에 대해 30% 가량 하락했다.

달러약세 현상이 가속화되면서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도 크게 흔들리고 있다. 약달러로 미국 자산에 대한 투자 감소 현상이 뚜렷히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약달러가 심화되자 유로화가 기축통화 자리를 대신 차지할 수도 있다는 관측마저 제기되고 있다. 달러화 일변도의 각 국 외환보유액도 유로화 등 다양화되기 시작했다.

◇ 유로, 달러 대신할 기축통화 급부상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전 세계 외환보유액에서 달러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지난 1분기 8년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1분기 전세계 외환보유액에서 달러화 비중은 64.2%로 전분기(64.6%)에 비해 0.4%포인트 하락했다. 지난 1999년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빈자리는 유로화가 채웠다. 유로화 비중은 같은기간 25.9%에서 26.1%로 높아졌다.

달러 약세와 함께 미국 국채 등 달러 자산에 대한 투자 매력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이미 투자자들은 미국에서 자금을 빼 유로화 등 기타 자산에 대한 투자를 늘리기 시작했다. 이는 달러 약세를 가속화시키는 또다른 요인이다.

달러는 원유시장의 기축통화 역할도 잃을 수 있을 전망이다. 서부텍사스산 중질유(WTI), 두바이, 브렌트유 등 3대 대표 유종의 기준가격은 달러로 매겨지고, 거래된다. 이에 따라 달러 가치는 원유 가치에 큰 부분을 차지한다.

미국이 강달러를 유지할 당시에는 유가가 낮더라도 산유국들은 어느정도 구매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최근 3년간 달러가 주요 통화에 대해 지속적인 약세를 나타내자 산유국들의 참을성도 한계에 달했다. 약달러가 지속될 경우 원유 거래 기축통화를 유로화로 바꾸겠다는 말도 서슴치 않고 있다.

◇ 달러페그 포기 움직임 가속화

달러화 약세가 추세로 자리잡으면서 세계 통화 체제에 이상 징후가 포착되고 있다. 그동안 달러페그를 유지해오던 국가들이 하나둘씩 달러 페그제를 포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석유 자원을 갖고 있는 중동국가들 사이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지난 5월, 6월 쿠웨이트와 시리아가 달러 페그를 폐지한데 이어 사우디아라비아 마저 달러 페그를 폐지할 것이란 전망이 나왔기 때문이다.

영국 텔레그래프는 사우디아라비아가 미국 금리인하 조치에도 불구하고 금리를 낮추지 않았으며, 이는 달러페그를 포기할 가능성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고 전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도 최근 달러 약세가 현 추세대로 지속될 경우 달러화 페그를 폐지하는 국가들이 점차 늘어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인플레이션 등 페그제 유지에 드는 비용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안그래도 오일 달러 때문에 인플레이션 압력이 가중되고 있는 중동 국가들로선 달러 페그를 유지하긴 힘든 상황이다.

이에 따라 사우디아라비아 이외에도 아랍에미레이트(UAE)와 카타르 등도 달러 페그 폐지 대열에 동참할 것으로 예상된다.

로열뱅크오브캐나다의 외환 분석가 애덤 콜은 고객들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사우디아라비아가 인플레이션으로 달러페그 포기 압박을 점차 강하게 받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최근에는 많은 투자자금이 유입되고 있는 홍콩에서도 달러 페그를 폐지해야 한다는 논란이 거세지고 있다.

이렇듯 달러 페그 포기 전망 확산은 국제 외환시장에서 달러화 약세를 더욱 촉발시키는 악순환의 요인이 되고 있다.

◇ 달러/유로 1.4달러 시대 열렸다

한편 20일(현지시간) 달러 가치는 유로화에 대해 사상 최저치를 경신하는 등 약세 행진을 이어갔다. 달러/유로 환율은 전날보다 0.77%(0.107달러) 오른 1.4065를 기록, 1999년 유로화가 탄생한 이후 처음으로 1.4달러를 넘어섰다. 달러/유로 환율은 이날 장중 한때 1.4099달러까지 치솟기도 했다.

또 캐나다 달러화는 1976년 이후 처음으로 미국 달러화 가치를 추월했다. 이날 캐나다달러/달러 환율은 0.9979달러에 거래됐다. [머니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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