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탁의광고읽기] 묵언 수행하는 현대 기업광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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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기업 이미지 광고는 특정 기업의 비전과 철학을 담아야 하는 것이기에 섣불리 접근하기가 힘들다. 특히 몇몇 대기업이 국가경제를 이끌어가는 우리나라에서는 더욱 그렇다. 국민 대다수의 시선이 그 기업에 집중되기 때문이다. 당연, 해당 기업의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일은 난제일 수밖에 없다.

 근래에 현대그룹의 기업 광고가 큰 변신을 시도하며 주목을 끌고 있다. 거의 파격적이다. 기존의 현대 기업광고는 건설·자동차·중공업 중심의 모기업 이미지에 맞게 통 큰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최근 제작된 세 편의 연작광고는 커트 없이 원 테이크로 이루어진 이미지만을 통해 현대의 ‘마음’을 표현한다.

 첫 편은 파도가 몰아치는 밤바다에 홀로 우뚝 선 등대가 불을 밝히는 이미지이다. 두 번째 편엔 빗방울이 땅바닥의 구멍을 뚫는 장면이 보인다. 세 번째 편엔 여자 아이가 등장한다. 화난 얼굴이 서서히 풀어지며 웃음으로 바뀌고 그 얼굴 위로 ‘희망으로’라는 자막이 뜬다.

 이 광고가 얘기하는 것은 무엇일까. 현대는 한국 경제를 쥐락펴락 할 수 있는 대기업이었다. 지금도 그 면모는 유지하고 있지만 지난날의 영화에 필적할 만큼은 아니다. 그룹 내부적으로 안 좋은 사건들이 터지기도 했다.

 이 광고는 현대가 참으로 하고 싶은 말이 많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한다. 너무나 할말이 많아 오히려 입을 닫을 수밖에 없는 상황은 누구나 경험한 것이리라. 광고의 잔잔한 영상 뒤로 숱한 하소연과 대단한 결의가 흐르는 것 같다. 지금 현대는 입을 열 때가 아니기에, 그 어느 풍문에도 아랑곳 않고 거친 바다의 등대처럼, 땅을 뚫는 빗방울의 한결같은 마음으로, 지금은 찡그리지만 활짝 웃을 미래를 준비해 가겠다는 메시지가 울려온다.

 현대는 이 이미지 광고를 내보내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내부 진통이 컸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이 광고는 그러한 불협화음까지 침묵으로 수용하겠다는 자세를 보인다. 마치 묵언수행 하는 수도자를 닮았다. 다른 대기업들이 화려한 내용으로 자신을 포장하고 있을 때 그저 묵묵히 ‘구도의 길’을 걷는 현대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김홍탁 광고평론가 (제일기획 크리에이티브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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