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구정 현대백화점 자리 35년 전 배밭 주인은 "명품 배 키워 연수입 7억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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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성에서 본 현대백화점 위치(左)와 개발되기 전 배밭의 모습.

"저쪽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자리가 옛날 저희 배밭이 있던 곳이죠." 그는 오래된 기억을 더듬으며 서울 압구정동 현대백화점부터 현대아파트 78동 자리까지 배밭이 있던 5000평을 정확히 집어냈다. 인근 부동산중개업소에 따르면 백화점의 상업 지역은 평당 1억원 이상, 아파트 부지도 평당 6000만원에 이른다. 다 합쳐 4000억원이 넘는 금싸라기 땅이다.

압구정동에서 3대째 배밭을 일구던 이윤현(60.사진)씨. 이씨가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으로 이사 온 것은 34년인 1973년이다. 압구정동 개발이 시작될 즈음 그곳의 배밭을 평당 1만7000원에 팔고 경기도 화성군에 다시 배밭을 마련했다.

요즘 이씨는 압구정동으로 자신이 재배한 배를 팔러 다닌다. "예전에 함께 배농사를 짓던 이웃들은 빌딩 여러 채를 가진 자산가로 변신했죠." 배밭이 수용당하자 인근 토지를 대토받아 땅부자가 된 것이다. 일찌감치 농사를 접고 부동산 임대료 등으로 여유 있는 노년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

"부럽냐고요? 아니요, 전혀-." 이씨가 부동산 쪽에 눈을 돌렸다면 매년 수십억원을 앉아서 벌지 모른다. 그가 2만2000여 평의 현명농장에서 지난해 올린 배 매출은 7억5000만원. 이제 이씨는 전국에서 '명품 배'로 이름을 날리는 국내 최고의 배 생산자가 됐다. 현명농장의 배는 롯데.현대.갤러리아 등 국내 유명 백화점에서 인기가 높다. 대만.일본 등 해외로도 수출된다. 이씨는 "지금 나는 행복하다. 꿈을 이뤘다"고 말한다.

이씨는 2200여 그루의 배나무를 자식처럼 챙긴다. "내가 먹을 수 있는 것을 배나무에도 먹여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배나무에 주는 영양제와 퇴비는 직접 만든다. 당귀.계피.감초와 같은 한방 영양제, 아미노산.목초액.칼슘 등의 영양 성분을 섞어 퇴비를 만든다.

"돈만 생각하면 배를 크게만 만들겠죠. 하지만 자식같이 여기면 조금이라도 예쁘고 실하게 만들려 노력하게 됩니다."

농약을 적게 쓰다 보니 병해충과 곰팡이균의 습격을 받는 일이 많다. 그런 피해를 줄이기 위해 과일 보호용 봉지를 개발해 국제특허도 받았다. 환기 자동화 시스템 등 그가 획득한 배 재배기술 관련 특허.실용신안은 모두 35개. 얼마 전에는 배즙.배고추장.배칩.배캔디도 만들기 시작했다. 이 같은 노력은 이씨에게 국무총리상(92년).신한국인상(97년).산업포장(2004년).신지식농업인장(2004년).경기도으뜸이상(2006년) 등을 안겨줬다.

이씨는 요즘 가격.품질 경쟁력을 넘어 또 다른 꿈을 꾼다. 농산물도 소비자들에게 감동을 주려면 차별화된 서비스로 무형의 부가가치를 창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한 게 축제다. 현명농장은 2003년부터 봄에는 배꽃 축제, 가을엔 배따기 축제를 연다. "이제는 소비자들에게 추억과 이야깃거리를 제공해야 한다"는 게 그의 소신이다.

요즘 그는 '미래상상연구소'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상상력을 키우기 위해서다. 이 연구소에는 권영걸 서울시 디자인서울총괄본부장, 정갑영 연세대 원주부총장 등 사회 저명인사들이 회원으로 있다. 연구소는 14일부터 연말까지 '만화책 읽기'를 한다. 그는 회원들과 함께 만화책을 읽으며 새로운 꿈을 꾸어 볼 참이다.

"농업 보조금에 매달리다 상상력이 고갈되면 그 길로 끝입니다. 한.미, 한.중 자유무역협정(FTA)을 뛰어넘으려면 농민들도 소비자들과 소통하고 끊임없이 연구해야 합니다." 배농사 외길을 걸어온 이씨가 요즘 가장 듣고 싶은 표현은 '장인(匠人)'이다. "장인의 혼을 담은 배를 한번 만들어 보는 게 꿈입니다. 아무리 많은 돈을 줘도 아깝지 않은 그런 배 말입니다."

화성=박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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